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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26. 2024

곳곳이 삶의 허방이니


 바람도 자는 산속 암자의 밤은 고요했다. 온 산을 감싸 안은 거대한 고요가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상처의 처치를 받는 동안 문비는 가만 눈을 감고 피부에 닿는 고요를 음미했다. 뭉근한 솜털 같은 고요, 라고 문비는 생각했다. 진짜 고요는 청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온다고.


 “다 됐구나.”


 스님의 말에 문비가 눈을 떴다. 스님의 손길이 가볍고 능숙해서 상처를 맡기고 있는 동안 문비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자신을 잘 돌보도록 해. 몸도 마음도 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세상은 고해의 바다고, 살아가다 보면 곳곳이 허방이니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항상 자기 자신을 아이 보살피듯 보살피며 살아가거라. 허방을 짚더라도, 어쩌다가는 아주 옴팡지게 짚더라도, 느리게나마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돌보고 보살핀다는 건 그런 거니까. 알겠니, 아가?”


 문비는 모호하고 희미한 웃음을 짓다가 운을 뗐다. 


 “그때…… 그러니까 그 예전에 엄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정인이 외가 쪽으로 내가 먼 친척 언니란다. 촌수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만큼 먼. 지금의 법으로는 친인척의 범위에도 들지 않는. 사실상 남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먼 친척. 그렇지만 우리집하고 정인이네가 가까이 살고 있어서 왕래가 잦았지.”


 엄마 쪽 집안이 무척 손이 귀하고 외롭다는 건 문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우리는 사이가 좋았지. 나는 정인이가 아가였을 때부터 귀여워했고 정인이도 커가면서 나를 많이 따랐고.”


 “엄마는 제게 한 번도 얘기해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런 친척 언니가 있다는 걸.”


 문비가 서글퍼진 건 엄마가 함구한 까닭을 알 것 같아서다. 문비 자신 때문인 것이다. 엄마의 그 언니, 스님이 된 친척 언니의 존재를 숨겨야 문비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 엄마의 가슴 속에 있었을 것이다. 


 “정인이가 여기로 찾아와서 재회하기까지 서로 적조했던 기간이 있었다. 우리의 정이 변한 건 아니고 각자 신산한 사연이 있어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


 엄마의 사연은 문비도 아버지에게서 들은 바가 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데서 비롯된 마음고생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 


 바깥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나고 공양주 보살이 들어왔다. 그녀는 테두리가 있는 양은밥상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누런 콩이 잔뜩 깔려 있었다. 한쪽에 그것을 내려놓고 앉은 공양주 보살은 콩을 고르기 시작했다. 썩은 것이나 돌, 부서진 꼬투리 조각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아기 놀라지 않았니? 파파할머니 스님이 알고 보니 친척 이모라니.”


 말해 놓고 나서 공양주 보살은 빙긋이 웃었다. 


 “조금 놀랐어요.”


 주름진 웃음이 서글서글 따스워서 문비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양은밥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콩 고르기를 도우려는 거였다. 


 “아니야, 아니야. 됐어. 괜히 손에 먼지 묻힐 거 없어. 나 혼자 해도 돼. 이게 나한테는 일이라기보다 심심파적이고 수행이니까.”


 공양주 보살이 문비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는 손사래를 쳤다. 


 “그 사람 하겠다는 대로 두어라.”


 스님도 공양주 보살의 말에 힘을 실었다. 문비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스님을 마주보는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스님은 어떻게 스님이 되셨어요?”


 아까부터 물을까 말까 망설이던 질문을 문비가 하자 스님이 되물었다. 


 “정인이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많이 궁금하니?”


 “네. 저한테 말씀하시는 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듣고 싶어요.”


 “불편하지 않다. 정인이가 대학 들어가던 그 해에 내가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거였단다. 내가 일하던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있었어. 수술을 받던 환자가 사망했지. 나도 그 수술방에 있었다. 집도의는 내 교수님이셨고.”


 스님이 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늙고 마른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그 다음은 뻔하다면 뻔한 전개였단다. 환자 가족이 소송을 제기했고, 교수님은 과실은 없었다는 입장이었지. 환자 가족은 나에게 증언을 요구했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알았지만, 그 건만 모르쇠를 잡고 넘어가면 의사로서 내 앞길은 탄탄대로라고 교수님이 회유를 하셨지만…….”


 듣고 있던 문비에게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뒷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병원 측은 양심을 택한 젊은 의사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그녀가 사직하도록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업계에도 소문이 돌아 그 의사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을 테고. 


 “한동안 방황하면서 이 산 저 산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출가를 결심했고 좋은 은사 스님과 인연이 닿아서 모시고 공부한 끝에 비구니계를 받았지.”


 문비는 표정으로만 수긍했는데 뒤쪽에서 열심히 콩을 고르던 공양주 보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님이 의사 선생님었던 건 나도 몰랐네. 어쩐지 그때 아기 받을 때 당황하지도 않고 준비부터 뒷감당까지 척척이더라니. 구급상자도 항상 너무 거하다 싶게 구비하고. 어쩌다 만나는 다친 산짐승들 치료하던 품새도 이제야 돌이켜보니 범상치가 않았네.”


 상 위의 콩을 향해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하는 공양주를 건너다보던 스님의 눈꼬리가 얼핏 웃는 듯 휘었다. 


 문비는 가늠해 보았다. 삶의 허방을 옴팡지게 짚는다는 것, 그것이 스님에게는 병원을 떠나게 된 그 일이었을까? 비구니계를 받고 스님이 되면서 자기 자신을 아이처럼 보살피는 마음을 얻었을까? 그리고는 차츰차츰 회복하여 마침내 저리 맑고 흔들림 없는 얼굴이 된 걸까?


 무심결에 방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문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스님은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풋잠에 빠져 있었다. 뒤돌아보니 공양주 보살도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문비가 공양주 보살의 소매를 살짝 잡아 흔들었다. 공양주 보살은 소리 없이 정신을 차리더니 가서 자라고 손짓했다. 


 자신이 쓸 방으로 건너가기 전 문비는 마당으로 나가 박달나무 옆에 섰다. 손을 뻗어 둥치를 쓸어 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코끝이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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