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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24. 2024

단단함을 닮기를, 달처럼 환하기를


 스님의 시선이 문비의 이마 위 드레싱 붕대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윽이 깊은 스님의 눈은 뭐든 다 꿰뚫을 것처럼 형형하면서 무슨 일이든 다 포용할 것처럼 인자했다. 문비는 의아했다. 저 눈빛이 왜 이처럼 편안하고 친숙한지. 


 “이마는 어쩌다 그랬니, 아가?”


 스님이 작게 혀를 찼다. 


 “별 거 아니에요.”


 상처를 싸고 있는 붕대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갔다. 문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버무렸다. 


 “아가, 오는 길에 저기 마당 입구의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니?”


 여리고 낮은 목소리로 스님이 다시 물었다. 


 “나무가 있었던 것 같긴 해요.”


 정확한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았다. 


 “박달나무다. 겨울이라 가지만 남았는데도 모습이 수려하지. 그 나무가 아가 네 나문데.”


 “제 나무요? 무슨 말씀이세요?”


 어리둥절한 문비를 향해 스님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너 그 나무 아래를 지나올 때 나무가 반가움을 못 이겨 네 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렸었는데. 못 본 게로구나.”


 듣고 있던 문비는 엄마 생각이 났다. 이런 식의 말본새는 엄마가 가끔 구사하던 거였으니까.


 “네 태를 거름으로 먹고 자란 나무란다. 내가 나무 아래에 아가의 태를 묻었으니까. 그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스님의 앞에 펼쳐진다. 겨울이 끝나가는 무렵. 얼어서 잘 파지지 않는 땅에 따듯한 물을 붓던 기억. 땅속이 녹기를 기다려 호미로 땅을 파던 기억. 땅을 도로 덮을 때는 젖은 흙 대신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황토를 헛간에서 가져다 채워 넣던 기억. 


 태를 묻으며 아이가 박달나무 속심의 단단함을 닮기를, 단풍 든 박달나무가 그러하듯이 아이의 삶이 달처럼 환하기를 부처님께 축원했던 기억. 


 “제가 여기 이 암자에서 태어났다는 뜻이에요?”


 “그래. 아가 너를 내 손으로 받았지.”


 눈을 가늘게 뜬 스님이 감개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스님은 눈앞의 문비가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는 바알간 신생아가 되는 걸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정일보다 이르게 태어난 아이는 아주 자그맣고 연약했으며 그럼에도 그녀가 보았던 어떤 신생아보다 보윰하니 예뻤다.


 막 세상에 나온 자신을 처음으로 만지고 첫 폐호흡을 터 주었던 사람을 불현듯 대면한 문비는 할 말을 쉬이 찾지 못했다. 돌부처로 변하기라도 한 듯 앉아만 있었다. 스님도 부드러운 낯빛으로 바라만 볼 뿐 침묵을 지켰다. 


 “저녁상 들여갈게요.”


 공양주 보살이 출입문 말고 다른 쪽 벽에 난 문을 열고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 얼굴 뒤에서 고소한 냄새가 방으로 흘러들었다. 공양주 보살의 뒤로 부엌의 전경이 엿보였는데 아궁이가 있는 재래식 부엌이었다. 


 “어서 들이게. 우리 아가가 멀리서 오느라 제법 시장할 테지.”


 스님이 좌식 책상을 옆으로 치웠다. 


 “밖은 벌써 캄캄해요. 바람도 없고 추위도 그만그만한 게 눈이 아주 푸지게 오긴 할 모양이에요. 스님.”


 저녁을 다 차린 두리반을 가뿐하게 들고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공양주 보살의 움직임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음식이 아기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자, 먹어 봐. 어서.”


 문비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며 공양주 보살이 권했다. 스님도 눈짓으로 재촉했다. 


 시금치로 색을 낸 만두피에 버섯과 채소를 주재료로 하여 빚은 채식 만두로 끓인 만둣국, 들기름에 노릇하게 부친 두부, 동치미와 고비나물 볶음. 수수하면서도 푸르고 누르고 희고 불그무레한 색감으로 눈을 사로잡는 저녁상이었다. 


 냄새도 좋고 색도 고왔지만 문비는 허기도 식욕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노인의 권고에 못 이겨 두부 부침을 한 점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동안 상황이 돌변했다. 갑작스레 배가 고프고 입맛이 돌았다.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동생이 농사지은 콩으로 내가 직접 두부를 만들거든. 가마솥에 군불 때서.”


 자부심을 담아 공양주 보살이 말했다. 


 문비는 그저 잠잠히, 부드럽게 뭉개지며 식도로 넘어가는 두부를 음미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이 두부를 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앞으로 먹을 모든 두부는 오늘의 이 두부와 비교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한 가지 한 가지 차례로 맛보고 천천히 잘 먹는 문비를 두 노인이 때때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간간이 음식에 대한 짧은 대화가 오가는 이외에는 조용한 식사 시간이었다. 


 이 만두와 동치미는 정인이가 좋아했단다. 이 두부 부침하고 고비 볶음은 설이가 좋아했지. 라는 말을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구태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가가 이렇게 커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어. 내 기억 속에서는 항상 작디작은 아가이기만 했으니. 내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이만큼이나 살았구나. 이제는 언제 입멸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살았어. 이렇게 아가를 다시 봤으니 더는 여한도 없고.”


 저녁상을 물리고 녹차를 마시면서 스님은 한탄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뭐.”


 공양주 보살이 거들었다. 


 “근데 스님 아기한테 어디까지 말씀하셨어요?”


 “아가가 여기서 났다는 것만.”


 “박달나무 얘기도요?”


 “그래. 거기까지.”


 “스님. 틈날 때마다 얘기를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들려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보살님하고 설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부터 시작해서요. 그럼 이 얘기는 했는지 저 얘기는 빼먹지나 않았는지 헷갈리지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 들었는지를 아기가 기억할 테니까요.”


 제안을 한 공양주 보살이 스님과 문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할까, 우리?”


 스님이 문비에게 물었다. 


 “네, 좋아요.”


 “그럼 그리 하기로 하고. 아가, 우선 씻고 오너라. 그러고 나서 얘기를 좀 더 하다가 자러 가든지 해. 네가 건넛방을 쓰면 된단다. 공양주는 이 방으로 건너오고.”


 “방은 깨끗이 치우고 아기 네 짐도 갖다 두었어. 아무 생각 말고 편안하게 지내거라. 여기는 네 집이나 진배없단다. 자, 이리 나오너라. 씻을 준비를 해 주마.”


 두 노인의 뜻을 문비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씻고 다시 스님 방으로 돌아오니 스님이 구급상자를 열었다. 


 “가까이 앉아 봐라. 상처 소독하고 드레싱 다시 해야지.”


 “구급상자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보다 내 솜씨가 한참 나을 게다. 이리 와 앉아서 믿고 맡겨 보렴.”


 좌식 책상에 흰 면포를 깔고 소독약과 거즈와 붕대, 집게를 늘어놓는 스님의 손길이 어쩐지 능숙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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