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Jun 21. 2024

수조 너머의 겨울 풍경


 문비의 가슴속은 온갖 색의 잉크를 무질서하게 쏟아 놓은 수조 같았다. 잉크가 물에 번지면서 엉클어지고 뒤섞여 만들어내는 색조는 어지럽고 탁하고 어두웠다. 그 수조를 통해 바라보는 겨울 풍경은 스산하고 차갑기만 했다. 


 하늘마저 잿빛으로 낮게 가라앉아 이 세계가 그대로 출구 없는 심연이 된 듯했다. 가도 가도 길의 끝에 영영 닿지 못할 것처럼 막막했다. 문비는 세차게 도리질했다. 날씨는 변하는 것이고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니 우선은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그 암자가 틀림없을 거였다. 문비가 생모의 태내에 있던 동안 생모와 엄마가 머물렀던 곳이. 두 사람이 어떤 심경으로 아기의 탄생을 기다렸는지 문비는 궁금했다.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이 엄마의 친생자로서 호적에 올랐는지. 생모는 어쩌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지.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던 문비는 스스로에게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안에 생모에 대한 모종의 마음이 싹터 있음을 깨달아서였다. 아직은 무어라 정의할 수 없고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문비가 보은에 들어섰을 때는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른 무렵이었지만 하늘이 잔뜩 흐려서 주위가 조금 어둑했다. 공양주 보살이 정해준 약속 장소는 보은의 어느 청과물 가게였다. 다행히 가게 앞에 차를 세우기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왔구나, 아기. 문비가 맞지?”


 문비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가게 안에서 노년의 여성이 뛰어나왔다.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감아 회색 망으로 묶고 승복 비슷한 회색 옷을 입은 품이 척 보기에도 불교와 관련된 인물로 보였다. 


 “오느라 고생했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문비의 손을 그녀가 덥석 잡았다. 


 “나는 공양주 할머니라고 부르면 된다. 일단 들어가서 숨 좀 돌리자꾸나. 여기가 내 동생네다. 어려워할 것 없어.”


 가게 안을 통과하니 살림집인 안채의 마당이 나왔다. 공양주 보살은 문비를 살림집의 안마루로 데리고 들어갔다. 


 “닮았네. 모르고 봤으면 몰라도 알고서 보니 많이 닮았어.”


 닮았다는 말이 생모에게 연결되는 말임을 알지만 문비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난감한 말이었다. 


 공양주 보살의 올케라는 이가 유자차 두 잔을 내어다주고 조용히 가게로 나갔다. 


 “자, 마셔라. 몸이 따뜻해질 거야.”


 “엄마가 동지마다 가져오던 팥죽…… 할머니 솜씨였겠네요?”


 그리운 듯 서글픈 듯 문비가 말했다. 


 “그럼. 내가 쑤었지.”


 “맛있었어요. 덕분에 해마다 잘 먹었습니다.”


 “아유, 우리 아기가 이렇게 잘 커서 예쁜 말도 잘하고.”


 대놓고 하는 아기 취급이 문비는 쑥스러우면서도 거북하지는 않았다. 공양주 보살의 허물없는 태도가 왜인지 모르게 문비 쪽에 지당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눈이 많이 올 거라는데 암자에 올라가도 괜찮겠니? 까딱하다가는 며칠이고 산에 갇혀서 못 내려올 수도 있거든.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스님한테 눈 온다는데 그렇게 대뜸 다녀가라고 아기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 어쩌시냐고 잔소리를 했더니 아니 글쎄 스님은 눈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을 거라고 하시네?”


 “네, 상관없어요. 며칠 머물러도, 머물게 해주신다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흐음, 우리 스님 아직 신통하시네.”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잔잔하고 말간 웃음이 좋아서 문비도 엷게 따라서 미소했다. 


 “내가 전화를 못 받은 게 실은 다 우리 스님 탓이란다. 감기가 더치더니 폐렴이 왔지 뭐겠니. 급하게 병원으로 모시느라 내가 핸드폰을 암자에 떨궈 놓고 간 거야. 내가 전화를 못 받는 바람에 아기 네가 얼마나 답답했을 거야?”


 “스님은 이제 쾌차하셨어요?”


 “쾌차하셨고말고. 좋아지셨으니 암자로 다시 가셨지. 배달 나간 내 동생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네 차는 여기 맡겨 두고 동생 차로 가자. 차로는 산 아래까지밖에 못 가는데 거기다 네 차를 오래 두기는 마땅찮거든. 장 본 것들이랑 이것저것 가지고 올라갈 것들이 있어서 어차피 동생이 같이 가서 짐을 져다 올려주기로 되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공양주 보살의 동생은 곧 나타났다. 그의 부인이 그랬듯이 과묵한 이였다. 문비는 공양주 보살의 손에 이끌려 그의 용달차에 올라탔다. 문비의 짐이 든 캐리어는 공양주 보살의 짐과 함께 짐칸에 실렸다. 


 “어둡기 전에 올라갈 수 있겠지?”


 차를 타고 가면서 공양주 보살이 동생에게 물었다. 동생은 차창 밖 하늘을 쓱 올려다보더니 ‘예.’하고 짧게 대답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문비의 캐리어 때문이었다. 문비는 자신이 들고 올라가겠다고 고집하고 공양주 보살의 동생은 자기 지게에 같이 얹으면 된다고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공양주 보살의 중재로 캐리어는 다른 짐과 함께 지게에 얹혔다. 


 한참 산길을 올라 암자 마당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 스님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가지런한 두상에 맑은 피부가 인상적인 고비늙은 비구니였다. 


 합장 인사를 하는 공양주 보살의 동생을 향해 스님이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바로 돌아서 내려가 버렸다. 자주 그러는 모양인지 스님도 더는 붙잡지 않았고 공양주 보살도 별 말이 없었다. 


 “스님. 저는 이것들부터 정리 좀 할게요.”


 툇마루에 부려 놓은 짐들을 가리키며 말한 공양주 보살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스님이 손짓으로 문비를 불렀다. 문비가 공손히 합장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작고 정갈했으며 세간이라고는 옷궤 하나와 좌식 책상 하나가 다였다. 문비는 털실로 짠 플로피햇을 벗고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이전 02화 경이로운 우주의 한 점 비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