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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19. 2024

경이로운 우주의 한 점 비유


 아니나 다를까 문비가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보니 라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길고 다감한 메시지였다. 



 흐린 하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내일 오후부터 눈이 온다는 예보입니다. 이 산골 마을에는 눈이 올 때 오겠다던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이 있습니다. 


 은성 누나는 아까 낮에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겨우살이를 채취하러 갔다가 귀여운 산토끼를 봤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할머니들 말씀으로는 눈이 많이 내리면 산토끼나 노루 같은 산의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기도 한다는데, 문비씨도 그런 아이들과 마주친 적이 있나요? 


 세 할머니는 폭설이 내리면 산짐승들이 내려올 만한 곳에 배춧잎이나 무나 당근이나 콩 같은 것을 뿌려 놓기도 하신다는군요. 이번 겨울에 폭설이 오면 우리도 동참하자고 은성 누나와 함께 즐거운 기대감으로 잔뜩 벼르고 있어요. 


 이번에 완성한 바이올린이 특별히 마음에 들게 나왔어요. 화상 통화로 독일의 스승님께 보여드렸더니(당연히 연주도 들려드렸어요. 내가 무슨 곡을 켰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부디 궁금해 해주기를.) 형태적인 면과 소리를 고루 칭찬해 주셨지요. 


 칭찬보다 더 기뻤던 건 실물을 꼭 보고 싶다는 말씀이었는데요. 아마도 봄이 되기 전에 이 바이올린을 들고 스승님을 찾아뵙게 될 것 같아요. 


 한실댁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건데 소나무겨우살이의 다른 이름이 송라라고 해요. 송라. 내 이름과 닮은 게 재미있어서 검색을 해봤는데 가문비나무의 겨우살이도 역시 송라. 신기하지 않아요? 


 가문비나무에 기대어 살아가는 송라. 우리가 운명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비유는 없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만났음이 경이로운 우주의 한 점 비유일지도. 



 ‘보고 싶다’는 말이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그러나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보고 싶다’는 말로 해석되는 메시지를 문비는 읽고 또 읽었다. 


 그리움과 애정은 하염없이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냉정한 이성은 복잡하고 어두운 현실을 지적하며 그녀를 주저앉혔다. 아직 맥이 뛸 때마다 희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이마를 짚으며 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숨겨온 비밀에 뿌리가 닿아 있는,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 외피만을 언급하는 것도 내키지 않고 상처의 내밀한 비극을 고백하는 건 더욱이 싫었다. 사랑 앞에 나는 이기적이라 할 만큼 비겁하구나, 문비는 자조했다. 


 분명 스스로를 위해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 이러는 걸 텐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주제에 이토록 필사적이라니. 


 핸드폰 메시지 입력 화면을 띄워 놓고 이번 참에는 가지 못한다는 말을, 이렇게 되어 나도 안타깝다는 말을, 미안하다는 말을 쓰다 지우고 쓰다 또 지웠다. 


 그러던 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눈에 익은 번호였다. 최근 들어 애타게 연결되기를 바랐던 그 번호. 문비는 떨리는 가슴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부재 중 전화가 여러 통 들어와 있어서…….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혹시나 해서……. - 


 지긋한 연륜이 느껴지는 음색에 투박하지만 온건한 말투다. 


 “아, 네. 제가 걸었어요. 저는 가문비라고 합니다만…….”


 자신의 용건을 무슨 말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문비는 말끝을 흐렸다. 


 - 가문비? 가문비……. 들어본 듯도 하고. - 


 역시 엄마 이름을 밝히는 게 좋겠다고 문비가 생각하는 차에 저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가문비라면 정인이 아이가 아니냐. 


 문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아아, 맞아요, 맞아. 이보살님네 그 아기. 여보세요? 맞지? 우리 이보살님 아기 맞지? -


 말투가 편하게 바뀌는 동시에 살가워지기도 해서 문비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아기라는 호칭은 위화감이 들었지만.


 “네, 맞습니다.”


 - 잠깐만, 내 우리 스님 바꿀 테니. - 


 - 여보세요? 아가, 네가 틀림없이 문비란 말이지? 정인이 딸 문비? -


 늙고 여린 음성이 감격에 겨운 떨림을 안고 물었다. 


 “네, 제가 문비입니다.”


 - 정인이가 그러더구나. 이런 날이 올 거라고. - 


 “엄마가 그런 말씀을요?”


 방금 들은 말들과 문비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스님, 동지, 암자, 팥죽……. 그러니까 지금 통화를 하고 있는 이 스님이 엄마가 동지 절기마다 다녀오던 암자의 스님인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가 싸 오던 팥죽이 이 암자의 팥죽이었던 거다. 


 아기, 아가. 이런 표현들을 쓰는 걸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 두 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분명 그렇게 불려 마땅하던 시절의 자신을 본 적 있는 분들이라고. 


 - 그래. 이렇게 전화를 한 걸 보니 아마도 궁금한 게 많을 테지. 아가, 한 번 다녀가겠니? -


 “갈게요. 가겠어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 속리산 인근의 작은 암자란다. 그러니까……. -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그래도 되나요?”


 - 그럼, 안될 게 무에 있겠니. 다만 조심해서 찬찬히 오너라. 이 번호 주인이 우리 공양주 보살인데 보은으로 나가서 기다리겠다는구나. 마침 봐야할 일도 있다고. -


 “알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통화를 끝낸 문비는 얼마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래 찾고 있던 비밀의 문의 열쇠를 갑작스럽게 손에 넣은 듯한 감회가 들었다. 후련한 동시에 떨리고 두려운. 


 이윽고 정신을 차린 문비는 라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의 지인을 급히 찾아뵙게 되어 그에게 갈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나도 속상하다고. 


 그리고 십오 분 뒤 문비는 먼 길 갈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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