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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17. 2024

예기치 못한 마주침


 울었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흐느낌이 저절로 잦아들 때까지 충분히 울었다. 자기연민이나 비애감에 심취하거나 중독되는 건 질색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참을 수 없을 지경일 때는 감정을 꾹꾹 눌러 억압하는 것보다 울어 버리기로 했다. 차라리 연기라도 하듯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서야 문비는 거울을 통해 상처를 확인했다. 우는 동안 수건으로 누르고 있어서 지혈은 된 상태였다. 그래도 찢어진 채로 방치할 수는 없어서 문비는 코트를 걸쳐 입고 운전을 해 응급실로 갔다. 


 이마를 꿰매준 의사는 상처 부위가 얼굴을 약간 벗어난 두피 쪽이라 흉터가 보일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문비는 희미한 쓴웃음을 띤 채 고맙다고 인사했다. 흉터 같은 건 지금의 문비에게는 걱정 축에 들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받지 못한 전화는 할머니로부터 걸려온 것이었고 다친 이마는 욱신거렸다. 고통스러운 의식의 심연이 갈수록 또렷해져서 문비는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뜬 눈으로 어둑새벽을 맞았다. 계속 누워 있어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만 일어나기로 했다. 


 어둡고 추운 새벽이었지만 문비는 트레이닝복과 러닝화를 갖추고 집을 나섰다. 근처 공원으로 간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이 목적인 달리기가 아니었다. 오직 달리기 위한 달리기였다. 문비는 조금씩 속도를 높이다 온 힘을 다해 질주했다. 


 가끔 이렇게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건 시신경 병증을 진단받은 이후부터였다. 시력을 잃고 나면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거칠 것 없이 전력 질주 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온몸으로 바람을 가르는 감촉, 땅을 박차는 힘찬 약동, 오롯이 자신의 것인 속도감,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힘껏 달릴 때 주어지는 이토록 생생한 자유로움. 이 소중한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문비는 때때로 미친듯이 달리곤 했다. 


 한참을 달리고 들어오니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좀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비는 알람을 설정하고 침대에 누웠다. 병원 진료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대려면 잘 수 있는 시간은 두어 시간에 불과했다. 


 “과로와 과민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시력이 조금 떨어지고 미미하게 색각 이상이 오긴 했어도 아직 특징적으로 나빠진다는 지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처방해 드린 락손은 꼬박꼬박 복용하고 있지요?”


 티거 의사의 말에 문비는 우선 안도했다. 


 “네. 그 약의 효과인 거겠죠? 아직 특징적으로 나빠지지 않은 거 말이에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약값을 결제할 때마다 손이 떨린다 할 만큼 고가의 비급여 의약이었다. 약값으로 뭉텅뭉텅 줄어드는 잔고가 문비로서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인 특이성도 있겠지만 극히 초기부터 약을 복용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정도로 진행이 느린 케이스는 흔치 않으니까요.”


 모니터를 보며 말하던 티거 의사가 문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문비의 눈과 꺼칠해진 얼굴을 보며 그는 염려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이 힘들다면……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상담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직설적이지만 환자에 대한 배려와 선의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문비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마 위 상처를 싸맨 드레싱 붕대를 가리기 위해 비니 모자를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져 이마에 상처를 냈다는 걸 문비는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기실 환자로서 티거 의사와 같은 담당의를 만난 것이야말로 다행에 속하는 일일 터였다. 엄마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면서 문비는 꽤 다양한 의료인을 겪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티거 의사만큼 명료하면서도 자상하게 환자를 대하는 의료인은 별로 없었다. 


 병원 앞 약국에 들렀는데 약사가 문비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자 전송된 처방전을 보고 약을 챙겨 나온 그녀가 알은체를 했다. 


 “어머나, 가문비씨. 잘 지내셨죠?”


 “네, 안녕하세요?”


 “자, 여기 있습니다. 약 확인하시고요. 이게 비급여에 워낙 고가라서 제약 회사에서 해주는 환자 지원을 받아도 정말 만만치가 않죠. 그래서 약의 혜택을 못 보시는 분들이 많고요. 약사 입장에서도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예쁘고 사람 좋은 중년의 약사, 조금 수다스러운 걸 그녀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다. 


 약을 가방에 넣고 돌아서던 문비는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노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또 만나다니 우리가 연이 있기는 있나 봐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소혜 여사였다. 정말이지 예기치 못한 마주침이었다. 


 “은성 언니 할머니…….”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던 문비가 겨우 입을 뗐다. 


 “다시 뵈어서 반갑습니다.”


 때와 장소가 당황스럽긴 해도 반가운 건 진심이었다. 


 “나도 반가워요. 나는 요 앞 치과에 다녀가는 길이라오.”


 “아 네. 저는 치과 옆 안과에…….”


 “아아 거기 잘 본다고 소문난 눈 전문 병원?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자면 눈 건강이 중하지, 그렇지요.”


 소혜 여사는 이미 약을 탔고 자신의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간 운전기사가 돌아올 시간이 거의 되었다. 


 “지난번 그 다래, 아주 맛있었다오. 바쁘지 않으면 차 한 잔 하겠어요? 다래에 대한 인사로 내가 사고 싶은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미안해하면서 문비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지금 그녀에게 없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이 할미 예감에 필시 또 기회가 있지 싶으니 다음을 기약하지요.”


 소혜 여사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 먼저 가 봐야겠네. 그럼, 잘 가요.”


 “안녕히 가세요.”


 겨울이 완연한 거리로 나온 문비는 잠깐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하늘을 보았다. 회색 구름이 덮인 흐린 하늘, 눈 예보가 있으려나?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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