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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28. 2024

겨울의 새벽은 어둡고 길어


 어떤 기척인가 소리인가를 듣고 문비가 눈을 뜬다. 방 안에 고인 어둠이 칠흑처럼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문비는 흠칫 놀라 불을 켠다. 잠을 깰 때 눈앞이 어둠이면 소스라치는 버릇이 생겼다는 사실을 문비는 통증처럼 깨닫는다. 


 밝아진 방의 전경이 문비의 눈에 들어온다. 낯설고 깔끔하고 작은 방, 어제 그녀가 지친 몸과 정신을 누였던 방, 고단한 그녀를 아늑하게 받아준 방. 그제야 문비는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소리에 신경이 이끌린다. 


 목탁 소리. 스님이 새벽 예불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문비는 방을 나간다. 집이 있는 터의 안쪽으로 따로 떨어진 한 칸짜리 별채에서 불빛과 소리가 새어나온다. 거기를 제외하면 사방이 먹처럼 검다. 문비는 홀린 듯이 그리로 발을 옮긴다. 


 조심조심 걸어가서 소리 없이 마루에 걸터앉는다. 공기는 얼음처럼 시리고 마룻바닥은 차가웠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규칙성과 반복성을 띤 청아한 목탁 소리가 듣기 좋았다. 문비는 또 무심결에 속으로 그 소리를 선율로 바꾼다. 선율은 문비의 뇌리에서 어느 사이 칼림바 연주가 된다. 


 “아가. 아가?”


 꽤 몰입했었나 보다. 어깨에 스님의 손이 닿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찌 이리 일찍 잠을 깼니? 여하튼 안으로 들어가자.”


 문비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던 스님이 혀를 끌끌 찼다. 


 “손이 얼음장이구나. 얼마를 이러고 여기 앉아 있었기에.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괜찮아요. 추운 줄도 몰랐어요. 목탁 소리가 재미있어서. 아, 재미있다고 하면 안 되는 거겠죠? 흥미로워서요.”


 “재미나 흥미나. 재미로 들린들 흥미로 들린들 또 다른 어떤 걸로 들리든 그거야 듣는 사람 마음인 게지. 마음 쓸 거 하나도 없다.”


 목조 불상 하나 달랑 모셔 놓은 단출한 법당이었다. 


 “익숙지 않은 방이라서 잠을 설친 모양이로구나?”


 “눈이 일찍 떠져서 그렇지 자는 건 푹 잤어요.”


 다른 때보다 일찍 자기도 했다. 스님이 졸음에 빠진 모습을 보고 자러 건너간 문비가 확인한 시각이 9시 20분이었다. 어쩐지 잠이 와 줄 것 같아서 불을 끄고 온돌 위의 이불 속에 누웠더니 과연 오래지 않아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정인이가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을 때 솔직히 나는 많이 놀랐다. 무엇에도 놀라지 않을 평정심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만이고 착각이었다는 걸 정인이가 나타나서 지적해준 셈이었어. 그때의 정인이는…….”


 말을 끊은 스님이 바깥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문비도 방금 전에 났던 소리를 들었기에 숨을 죽이고 소리가 다시 나기를 기다렸다. 


 “무상이가 왔구나.”


 스님이 문을 열자 마루 아래에 있던 개가 낑낑 소리를 냈다. 


 “저 아이 밥 좀 주고 오마.”


 스님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문비는 자신을 향해 늘 웃어주던 따뜻한 개 깨금이 생각이 났다. 문 밖의 개는 깨금이보다 조금 작고 털이 검고 표정이 차가운데 머루 같은 맑은 눈만은 비슷했다. 깨금이와는 친해졌지만 낯설고 무뚝뚝한 개는 역시 겁이 난다. 


 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문비는 고민스러웠다. 저 아이를 매어 놓으라고 하자니 자유를 빼앗는 것이 미안하고, 그냥 있자니 불안하고. 


 “왜 그러니?”


 이내 돌아온 스님이 물었다. 문비의 얼굴에서 석연치 않은 빛을 읽어낸 거였다. 문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갈등했다. 


 “무상이 때문이니? 저 아이 이름이 무상이란다. 덧없다는 뜻에서, 모든 집착을 벗어났다는 뜻에서, 무상이라고 부른다. 저 오고 싶을 때 오고 저 가고 싶을 때 가지.”


 “떠돌이 개라는 말씀이세요?”


 이런, 떠돌이 개는 그냥 낯선 개보다 더 무서운데. 문비는 한층 난감해졌다. 


 “무서워하는 게지?”


 “네.”


 미안하고 민망하고 곤란한 가운데 문비가 인정했다. 


 “걱정할 거 없다. 사람을 보면 멀찍이 피하거나 숨어 버리니까. 먹이를 챙겨주는 나나 공양주에게도 세 걸음 안쪽으로 가까이 온 일이 없을 정도란다. 사료를 준다고 꼬리를 흔드는 법도 없어. 주기 싫으면 안 줘도 상관없다는 듯 고자세야. 늘 넉넉하게 주는데도 많이 먹지도 않아. 제법 독특하지?”


 “무상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네요. 암자라는 공간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요.”


 사람과 거리를 둔다니 일단 안심이었고. 떠돌이 개도 품위라는 걸 가질 수 있구나, 문비는 감탄했다. 한다는 품새가 마치 꼬장꼬장한 수도승 같지 않은가. 


 “자,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표정을 가다듬은 스님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문비도 느슨해졌던 앉음새를 고쳤다. 


 “그때의 정인이는 파리하고 초췌했다. 겉보다 속이 더 상해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어. 마음을 크게 다쳤다는 걸.”


 정인에게서는 한동안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고 방기한 사람의 허망이 배어났다. 스님은 그저 순하고 향긋한 음식을 먹이려, 안온한 잠을 재우려, 고요하게 쉬게 해주려 애썼다.


 “며칠을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잠만 자던 정인이가 어느 저녁에 묻더구나. 여기 와서 지내도 되느냐고. 나야 당연히 안 될 것 없다고 대답했지. 그런데 다시 묻더구나. 동행을,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올 텐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괜찮다고 했더니 또 묻더구나.”


 그 물음을 문비는 알 것 같았다. 배안에 아이를 품은 젊은 여자라고, 그래도 괜찮으냐고, 엄마는 물었을 것이다. 여기 말고는 달리 숨을 데가 없다는 눈빛으로 절박하게 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인이가 설이를 데리고 왔다. 설이는…….”


 뒷말을 하기 전에 스님은 잠시 틈을 두고 문비를 응시했다. 문비는 스님의 눈빛이 선뜩 아팠다. 어쩔 수 없는 천륜으로 이어진 두 사람을 포개어서 보고 있는 눈빛이었다. 


 “밝고 곱고 영민했지.”


 문밖은 정적에 잠겨 있고 겨울의 새벽은 어둡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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