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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01. 2024

슬픔을 모르는 채로 슬프고


 땅에서 난 온갖 것들이 푸른 물을 머금고 태양빛 아래 반짝이는 계절, 여름이었다. 


 계절이 데려오기라도 한 듯이 돌연하게 암자에 깃들어 지내게 된 두 사람, 정인과 설. 스님과 공양주에게 그들은 마치 새들 같았다. 숨 쉴 곳을 찾아, 숨을 곳을 찾아 암자의 처마로 날아든. 지친 새, 아기 새.


 스님은 당장 암자 주위를 따라 나무 울타리를 두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설의 안전을 위한 거였다. 스님이 아직 중년이고 깡도 있고 기운도 있어서 힘쓰는 일도 척척 해내던 시절이었다. 


 공양주 보살은 오전에 두부를 만들면서 따로 떠 놓은 순두부를 내어와 아기 새처럼 가냘픈 설에게 먹였다. 입덧으로 잘 먹지를 못해 배배 말라 있던 설이었는데 공양주 보살의 순두부는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 모습을 본 정인은 크게 안도했다. 그러나 정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무렵의 정인이는 전에 없이 과묵했지. 말은 별로 없었지만, 설이라는 아이를 향한 정인이의 눈빛은 복잡하면서도 너그럽고 따사로웠단다.”


 회상을 풀어 놓는 스님의 눈빛도 그러했다. 듣고 있던 문비의 가슴이 저릿해진 것은 그러한 엄마의 눈빛을 이설은 알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설이는 잘 웃고, 무엇이든 스스로 해 보려고 하고, 산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하나하나 직접 알고 싶어 하고 또 좋아했지.”


 설은 발랄했다. 그런데 그녀의 발랄함이란 바탕에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가 깔린 발랄함이었다. 그런 특유의 성향은 정인을 대할 때 가장 두드러졌다. 


 설은 여름 산의 모든 것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정인은 그녀의 관심사나 호기심에 가능한 한 직접적인 답을 주고자 애썼다. 


 정인은 그림자처럼 설에게 붙어 설을 데리고 다녔다. 설이 계곡을 궁금해 하면 계곡으로 데리고 가고, 산딸기를 직접 따 보고 싶다고 하면 산딸기 덤불 앞으로 안내하고, 나비를 궁금해 하면 나비를 만질 수 있게 해주고, 각종 야생화를 촉감이나 향기로 구분할 수 있게 도왔다. 


 “공양주는 설이 그 아이 입에 맞는 먹을거리를 잘도 짚어내서 해 먹이곤 했지.”


 머윗대 볶음이나 양념해서 살짝 찐 깻잎 순, 두부장조림, 초피장떡, 프라이팬에 얇게 펴서 구운 쑥떡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먹는 형편이 차츰 나아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입덧은 가라앉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설이의 야위었던 뺨에도 살이 좀 올랐지. 정인이도 건강해졌고.”


 문비는 그 즈음의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생모의 태내에서 얼추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 가고 있었겠지. 모체가 가지는 정서를 탯줄을 통해 동시적으로 느끼기 시작했겠지. 기쁨을 모르는 채로 기쁘고, 슬픔을 모르는 채로 슬프고, 두려움을 모르는 채로 두렵기도 했겠지. 


 “스님, 아침 공양 하셔야죠.”


 공양주 보살이 부르는 소리에 문비가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날이 밝는 기미가 보였지만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린 회색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스님은 사시 예불을 준비하고 문비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공양주 보살은 몇 번이나 말리다 결국 허락했다. 문비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공양주 보살은 정리할 것이 있다며 뒤뜰에 있는 헛간으로 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들을 마른 행주로 닦아서 가지런히 엎어 놓은 문비는 마당으로 나왔다. 이리 저리 둘러보았지만 떠돌이 개 아니 무상이는 보이지 않았다. 문비는 산책을 좀 하기로 했다. 


 외투를 걸치고 나선 문비는 먼저 박달나무에게 다가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잘 잤니? 어젯밤에 첫인사를 나눌 때보다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태가 이 나무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무가 남 같지 않았다. 


 마당을 나가 산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문비는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이설, 그녀도 이 길을 걸었을까? 부른 배를 안고, 내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조심 그렇게? 그녀 안의 나까지 해서 우리 셋이 함께 저 이끼 낀 바위 절벽을 올려다보았을까? 비에 젖은 낙엽의 내음을 함께 맡았을까?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눈의 소리를 함께 들었을까? 


 한참을 걷다가 암자로 돌아오니 문비의 코와 뺨이 한기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공양주 보살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내왔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몇 모금 호로록거리는 동안 손과 몸에 훈기가 조금씩 퍼져 나갔다. 


 “우리 아기. 이것도 좀 먹어 봐.”


 다시 부엌으로 갔던 공양주 보살이 들어와 찻상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흰 접시 위에 꽃 모양으로 쌓여 있는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동글납작한 녹색. 문비는 그것이 스님의 얘기 속에 나왔던 얇게 펴서 구운 쑥떡임을 알아보았다. 


 “저, 이거 알아요. 구운 쑥떡. 아까 스님께 들었어요.”


 “그렇구나. 자, 맛을 보렴.”


 문비는 공양주 보살이 권하는 대로 떡 하나를 먹었다. 순하고 담백하고 고소했다. 입덧하던 생모의 입맛을 달래준 음식임을 알아서인지 먹는 동안 마음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그래서 문비는 고작 하나를 먹고는 더 먹지 못했다. 


 “헛간에 있는 궤짝에서 이걸 찾았다. 하도 예전에 넣어 두고는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기억이 나지 뭐겠니. 아기 네가 와서, 널 보아서 기억이 났지 싶어.”


 두꺼운 비단 보자기로 싼 보따리였다. 모양이 네모진 것을 보면 책 같은 종류가 들어 있을 터였다. 


 “이게…… 뭔데요?”


 “나도 잘 모른단다. 본디 설이 물건들이었다는 것밖에는.”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문비는 심장이 쿵쿵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기가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고, 싫다고 하면 내가 스님이랑 상의해서 처리하고.”


 “혹시 제 엄마가 이것에 대해 별달리 부탁드린 건 없고요?”


 “이보살님이? 그 옛날에, 그냥 여기 보관해 달라고 했던 것 말고는 따로 무슨 말은 없었지, 아마? 그래, 없었어.”


 문비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긴 공양주 보살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 열렸다 닫히는 문의 틈새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흰 것이 문비의 눈에 들어왔다. 눈,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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