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Jul 03. 2024

어떤 빛깔 어떤 모양이었을까


 공양주 보살이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가져왔을 비단 보자기는 보라색이었다. 퇴색되어 본래의 선명한 빛깔과 광택은 잃었지만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보자기의 매듭을 푸는 문비의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보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물건들은 점자책 몇 권, 뜨개실로 뜨다 만 아기 원피스였다. 문비는 뜨개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봄의 새순을 연상시키는 연두색의 톡톡한 실로 대바늘뜨기한 앙증맞은 옷은 전체의 3분의 2쯤 될 법한 형태였다. 치마를 다 뜨고 코를 줄여 상의를 뜨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단한 그대로 대바늘이 꽂혀 있었다. 


 뜨개 상태는 일정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짜임이 성글거나 빡빡하거나 비뚠 부분들이 있었다. 문비에게는 그 부분이 증거로 보였다. 그 원피스를 짜던 사람이 생모 이설이라는. 


 문비는 뜨개옷을 가만히 쓸어 보다 대바늘을 두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그 대바늘을 쥐고 오직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한 채 속으로 코를 세어 가며 뜨개질을 했을 두 손을 그려 보았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속에서 일렁였던 물결은 어떤 빛깔 어떤 모양이었을까? 문비의 목 안쪽이 뜨겁게 아파 왔다. 얼마 동안 주먹을 꽉 쥐고 앉아 정체 모를 감정을 억누르던 문비가 옷을 내려놓고 점자책을 들었다. 


 휘리릭 몇 장을 넘겨보던 중에 툭 하고 무릎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을 주워 유심히 바라보던 문비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주민등록증이었다. 증명사진 속 이설은 앳되고 청초했다. 문비에게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낯익은 얼굴.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따져 보자면 조금 다른 면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분명 닮아 있었다. 문비가 늘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과. 


 사진으로 보는 이설은 시각 장애인 같지 않았다. 눈동자가 어렴풋이 꿈꾸는 듯 보이기는 했지만. 문비는 그 눈동자에 눈을 맞추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을 한 번씩 훔치면서, 길게 길게. 


 그러는 동안 문비의 마음에 우묵한 공간이 생겨났다. 아직은 연약하고 투명하지만 한없이 포근포근한 무형의 공간이었다. 


 느릿느릿 성글게 나부끼던 눈이 함박눈으로 변한 건 오후 늦게부터였다. 본격적으로 쌓이는 눈이 흰 융단처럼 땅을 덮었다.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하얗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문비는 상념에 젖어 눈밭을 걸었다. 처음에는 얕게 나던 발자국이 점점 옴폭옴폭해졌다. 발자국이 깊어질 때마다 의문도 깊어졌다. 


 뜨개 원피스는 왜 미완성으로 남았을까? 뜨개질이 너무 느려 옷을 다 뜨기도 전에 출산을 하게 된 탓일까? 

 아니야. 문비는 혼자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아닐 것이라는 강렬한 직감이 있었다. 


 “얘, 아가. 아가야.”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르고 길 가운데에 우두커니 섰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가까이 왔다. 뒤돌아보니 스님과 공양주 보살이 나란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했니?”


 스님이 물으면서 문비의 모자와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 주었다.


 “비단 보자기 안에 뜨다 만 아기 옷이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게 거기 들어 있었구나. 설이가 뜨던 건데.”


 공양주 보살이 문비의 말을 받았다. 세 사람은 나란히 암자를 향해 걸었다. 


 “왜 완성하지 못한 걸까요?”


 망설이던 문비가 물었다.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서로를 건너다보았다. 


 “한 코 한 코 정성을 들여 열심히 떠 나가던 것을 어느 날부터인가 딱 치워 버리더니 다시는 손에 잡지 않더구나.”


 이번에도 공양주 보살이 대답했다.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분명히. 알고 싶어요. 말씀해 주세요.”


 꽤 단호하게 말한 문비가 양쪽에서 걷는 스님과 공양주 보살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아마 늦가을 들어서였지 싶다.”


 긴 한숨 끝에 스님이 입을 열었다. 


 “설이가 무슨 검사를 받아 봐야겠다고 해서 정인이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러고 얼마쯤인가 후에 검사 결과가 나온 거 같더구나. 그쯤이었지. 설이가 변한 것이.”


 검사라는 말에 문비는 곧바로 자신의 눈에 유전된 시신경 병증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 이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각 장애가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이설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뱃속의 아이가 염려되었을 것이다. 아이도 엄마와 같은 장애를 가질까 봐서. 


 “어떻게 변했는데요?”


 “어두워졌어. 말도 없어지고, 웃지도 않고, 아기 옷도 안 뜨고, 아기에게 들려준다고 매일 듣던 음악도 안 듣고.”


 공양주 보살이 내리뜬 눈으로 발끝만 한사코 보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스님이었다. 


 “변한 건 설이만이 아니었다. 정인이도 변했지. 그 둘이 암자에 오고부터 그때까지는 설이가 밝음이고 정인이가 어둠이었다면, 그때를 기점으로 반대가 되었어. 설이가 어둠 속으로 침잠할수록 정인이는 밝아지려고 안간힘을 썼지.”


 문비는 표 안 나게 어깨를 떨었다. 갑자기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오한이 찾아왔다. 심장마저 시리게 하는 이런 한기는 무엇으로 어떻게 녹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건 정인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었다. 어둡고 추운 곳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설이의 마음을 붙들어야 했으니까, 설이와 아가를 지켜야 했으니까. 정인이는 죽을힘을 다해 밝고 따뜻한 곳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지.”


 암자 마당에서 문비는 떠돌이 개 무상이를 발견했다. 법당 뒤편 산기슭을 내려오다 문비를 보고 우뚝 멈춰 선 무상이의 검은 털이 눈을 맞아 희끗희끗했다. 금방이라도 뒤돌아 도망칠 태세로 긴장해 있는 무상이를 향해 문비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가지 마. 그렇게 가면 언 발과 몸을 어디에서 녹이겠니?


이전 07화 슬픔을 모르는 채로 슬프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