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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05. 2024

눈의 무늬


 눈송이는 한없이 부드럽다, 라고 문비는 생각한다. 


 언젠가 배꽃을 보러 갔다가 과수원의 배꽃이 일제히 흩날리며 지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해는 환한데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후드득 소나기가 내렸다. 가볍게 지나가는 소나기였지만 끝물 꽃들을 떨어뜨리기에는 충분했다. 흰 꽃보라가 허공을 수놓다 땅으로 내려앉았다. 


 지금, 지는 배꽃처럼 눈이 온다. 


 배꽃잎 같은 눈송이가 하늘하늘 날아와 문비의 손바닥에 앉는다. 그리고 녹아 사라진다. 눈송이는 부드럽지만 차갑고 무정하다. 하나의 눈송이는 나약하고 무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뭇가지를 꺾고 집을 무너뜨린다. 적설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때로 가혹하다. 


 눈을 닮은 사랑도 있을까……. 


 문비는 눈 녹은 물기가 남은 손을 외투에 문질러 닦았다. 


 스님과 공양주 보살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문비는 알 수 없었다. 어떨 때 보면 모든 걸 다 아는 듯싶고 또 어떨 때 보면 끝까지 다 아는 건 아닌 듯도 싶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까지 문비의 질문에 차곡차곡 답해 주었고, 그 답은 매번 진솔하고 성실했다. 


 “깼어? 좀 어떠니?”


 법당 뒤뜰에서 나온 공양주 보살이 마당의 문비를 발견하고는 따뜻하게 말을 붙였다. 


 “아직 저녁 공양까지는 여유가 있는데 좀 더 누워서 쉬지 그러니, 아기?”


 문비는 아까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묵직한 두통과 오한으로 까부라졌었다.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그런 문비에게 감기약을 먹이고 이불 속에 누워 쉬게 했다. 까무룩 짧은 선잠에 빠졌던 문비는 방금 전 웬만큼 가벼워진 몸으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밤이 들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기 전에 눈이 오는 풍경을 좀 더 보고 싶어서였다.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해요. 이젠 괜찮은 거 같아요.”


 “반짝 감기약 효과지 뭐. 그래도 젊음이 좋긴 좋구나.”


 공양주 보살이 문비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무상이 보셨어요? 아까 법당 뒤쪽에서 내려오는 걸 봤는데 발자국 하나 눈에 띄지를 않아서요.”


 “법당 뒤 굴뚝 옆 처마 아래에 있어. 사료를 좀 주고 오는 길이다. 이렇게 날이 궂을 때는 사람이 다 잠들고 나면 부엌의 아궁이 옆에 와 있다가 다음날 새벽 사람이 깨기 전에 몸을 피한단다.”


 “새벽 일찍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모르지. 발자국을 보면 법당 뒷산을 따라 위로 향하는데, 길이 없는 산비탈이라 사람은 못 올라가니까.”


 문비는 눈을 들어 무상이가 오른다는 뒷산을 보았다. 산 위에 무엇이 있어 떠돌이 개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아니 꼭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이 생각이야말로 덧없는 것일지도.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떠돌이 개는 매일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스님이나 나나 무상이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또 우리 눈앞에 없을 때의 무상이의 삶에 간섭할 생각도 없어. 사료를 주는 건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상이가 먹어 주면 오히려 고맙지.”


 말을 마친 공양주 보살은 부엌으로 들어가고 문비는 싸리비를 들고 마당의 눈을 쓸었다. 공양주 보살이 열린 부엌문으로 내다보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눈은 계속 내리고 쓸었던 자리에 새로 또 쌓였다. 


 문비가 마당의 눈을 쓰는 동안 날이 빠르게 저물었다. 어둠 속에서도 설광은 희미하게 살아 있어 암자 주위 경치는 무슨 효과를 쓴 무대 장치 같았다. 


 법당에서는 저녁 예불 올리는 소리가 차분하게 울리고, 옛날식 부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공양주 보살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스님은 자연스럽게 문비의 이마 상처를 봐주었다. 


 “잘 낫고 있구나, 아가.”


 “두 분은 왜 저를 이름으로 안 부르실까요?”


 문득 궁금해진 문비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마침 찻상을 들고 들어오던 공양주 보살이 듣고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제가 말할까요, 스님?”


 스님이 눈짓으로 그러라고 했다. 


 “아기 네가 여기를 떠날 때까지 이름이 없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너를 아기, 아가, 그렇게 불렀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우리는 그 호칭이 입에 익어 있어서.”


 태어나서 이름이 없이 지낸 기간이 있었다니. 문비는 은근히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나오고도 한동안 이름을 받지 못했다는 건 통상적이지 않은 경우 아닌가. 


 “어째서……?”


 문비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하릴없이 맥이 빠지고 불안해졌다. 


 “내내 기운을 못 차리고 시름시름 앓던 설이가 너를 낳고 나서 많이 위중해졌단다. 설이가 잠깐씩 의식을 찾을 때마다 정인이는 아이 이름을 지어 달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스님의 설명은 느릿느릿 가늘게 이어지다 뚝 끊어졌다. 문비는 시선을 떨구고 목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가슴이 답답하고 뜨거웠다. 


 “얼마…… 만이었어요?”


 나를 낳고 얼마 만에 그녀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나요. 


 “일곱 날 만이었지.”


 “어디에…….”


 “없어. 어디에도. 설이의 바람대로 높은 곳에서 뿌려 주었다.”


 한동안 묵연히 숨만 고르는 문비를 스님과 공양주 보살이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스님이 가까이 다가앉아 문비의 등에 야윈 손을 살갑게 얹고 말했다. 


 “아가 태어난 지 삼칠일 되던 날 정인이가 아가를 데리고 여길 떠났단다. 떠나던 날 아침에 정인이가 아가에게 문비라는 이름을, 내리는 눈의 무늬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었지.”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그 아침의 기억이 선연했다. 암자를 나선 정인은 설을 뿌린 절벽을 향해 목청껏 외쳤었다.  


 문비-, 아이 이름은 문비-, 무늬 문, 눈 펄펄 내릴 비-, 설이 네가 세상에 남긴 예쁘고 예쁜 무늬, 문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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