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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10. 2024

불과 노고와 시간


 자질구레한 일들로 몸이 꽤 바쁜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눈은 쉬엄쉬엄 그러나 꾸준히 내렸고, 암자의 세 사람은 하루 한 번씩은 반드시 지붕과 마당의 눈을 치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암자 마당에 무릎 높이를 웃도는 눈이 쌓였을 것이고 요사채와 법당과 헛간을 오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붕 역시 어딘가가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매일 부지런을 떨었기에 암자는 폭설에도 무사하고 안락했다. 


 떠돌이 개 무상이는 법당 뒤편 굴뚝 옆에 거처가 생겼다. 스님이 싸리나무를 엮어 자그마한 움막을 만들었다. 그러자 공양주 보살이 겉에 비닐을 몇 겹 덮고 안쪽에는 헌 이불을 두르고 또 깔았다. 


 어느 저녁 무상이는 뒷산에서 반쯤은 헤엄치듯 눈을 헤치면서 힘겹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저를 위해 마련된 집과 안에 놓인 사료를 보고도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기만 하더니 이윽고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태도로 느릿느릿 들어갔다. 


 그 며칠 사이 공양주 보살은 가마솥에 콩을 삶고, 맷돌로 갈고, 그것을 다시 가마솥에 끓여 두부를 만들었다. 찹쌀로 새알심을 빚어 넣고 팥죽을 쑤고, 가을에 만들어 놓은 도토리 가루로 묵도 쑤었다. 


 문비는 공양주 보살을 따라다니며 보조 역할을 했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오래 계속해서 저어야 하는 묵 때문에 팔이 뻐근하기는 했지만. 


 두부도, 팥죽도, 도토리묵도 불과 노고와 시간의 미학이었다. 아궁이 속 장작불의 세기를 때맞추어 조절해야 하고, 눋지 않도록 크고 긴 나무주걱으로 잘 저어 주어야 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되 졸아붙지는 않도록 적절한 때에 불을 치워 주어야 했다. 


 눈이 완전히 그친 어느 날, 마당의 박달나무 옆에는 눈으로 된 귀여운 가족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건 기실 우발적인 결과물이었다. 처음에는 문비가 심심풀이로 만든 눈사람 하나뿐이었는데. 


 “꼬마 눈사람이네? 이거, 아기 너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거예요.”


 “그래? 나름 귀엽기는 해도 우리 아기만큼 예쁘지는 않구나.”


 공양주 보살이 주름진 얼굴로 천진하게 웃더니 눈사람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내가 별 재주가 없는 인생이다만 손끝 야물다는 소리는 꽤 들었거든. 어디 나도 하나 만들어 볼까나.”


 눈을 뭉치고 깎아내고 다듬고, 한참을 열중한 공양주 보살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은 개 모양의 눈 조각이었다. 


 “무상이하고 닮았어요.”


 “얼추 비슷하니? 심드렁한 표정이 나와야 하는데 그건 좀 어려워서.”


 장갑 낀 손을 탁탁 털더니 허리에 얹고 자신의 예술품을 내려다보는 공양주 보살의 기세는 해맑고 의기양양했다. 


 “척 보기에 무상이라니까요. 이렇게 되니 제 눈사람이 좀 안됐네요. 변변치 못한 손을 만나는 바람에……. 그래도 멋진 친구가 생겨서 기쁠 거예요.”


 눈으로 만든 사람과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문비의 얼굴에 웃음이 떠 있었다. 


 거기에 눈사람 하나가 더해진 것은 공양주 보살과 문비가 도토리묵을 쑤느라 교대로 가마솥 안을 휘젓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는 식혀서 굳히기였다. 공양주 보살은 걸쭉하게 쑤어진 묵을 여러 개의 냄비에 나누어 담았다. 그것들을 마루로 들어다 놓는 건 문비가 맡았다. 묵 냄비를 다 옮겨 놓고 돌아서던 문비는 자신이 만든 눈사람 옆에 새로운 눈사람이 생긴 걸 발견했다. 


 “어? 눈사람이 늘었어요. 공양주 할머니.”


 놀라서 외친 문비가 박달나무 쪽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새 눈사람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제법 정교했으며, 예뻤다. 


 “아니, 손재주 좋은 사람은 따로 있었네. 아기 너하고 똑같이 만들어 놓으셨어. 우리 스님, 참말이지 이래저래 대단하시다니까.”


 어느새 다가온 공양주 보살이 손뼉까지 치며 찬탄했다. 


 “저, 그런 말 들은 적이 있어요. 의사들이 손재주가 뛰어나다고요.”


 스님의 옛 직업을 떠올린 문비가 말했다. 


 “그럴 법한 소리구나. 그 복잡한 사람 몸속도 째고 꿰매고 해서 고치는 사람들 아니냐. 웬만한 솜씨로는 어림없겠지.”


 문비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문비를 닮은 눈사람과 다정히 옆을 지키는 또 하나의 눈사람과 얌전히 엎드린 순한 개가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단란한 가족사진 같은 그것을 들여다보다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에게로 문비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아기도 같이 저녁 예불을 올려야 하니까 시간 되면 법당으로 오너라. 알았니?”


 공양주 보살이 부엌으로 가다 말고 문비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네. 그럴게요.”


 문비는 선선히 대답했지만 내심 의아했다. 여기 와 있는 동안 한 번도 예불에 참여하라고 권한 적이 없던 분들이 갑자기 웬일일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동짓날이었다. 갸웃거리던 문비는 동지 예불이라서 그런가 보다 혼자 끄덕였다. 


 날은 점점 개었고, 어스름이 내리면서는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청자 조각 같은 하늘이 드러났다. 거기 잔별 몇 개가 초롱거렸다. 


 시간에 맞춰 법당으로 간 문비에게 스님이 간단한 절차를 일러 주었다. 공양주 보살은 별로 복잡할 것도 없지만 잘 모르겠거든 자신이 하는 대로만 하라고 문비를 안심시켰다. 


 “실은 오늘 저녁 예불은 기일 재를 겸하는 거란다.”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덧붙였다. 


 “기일 재…… 라면 속세로 치면 제사…… 인 거잖아요?”


 누구를 위한 기일 재인지 문비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이가, 자신을 기억해줄 거라면 세상 떠난 날 말고 동짓날에 재를 올려달라고 했단다.”


 스님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 아이는 동지 절기를 좋아했어.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겨울이라서 좋고,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서 좋다더구나. 하루를 밝음과 어둠이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가지는 게 공평하게 느껴진다나.”


 “새알심 들어간 팥죽도 무척 좋아했잖아요. 설이 그 아이가.”


 공양주 보살이 말을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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