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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12. 2024

그건 너의 동그란 이마였을까


 차분하고 간소하게 진행된 기일 재가 끝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저녁 공양을 했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이 아니라 아늑한 침묵이었다. 세 사람의 마음이 침묵을 통해 이어져 한 군데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새알심이 넉넉히 들어간 팥죽은 무척 풍미가 좋았다. 맛있다고 느끼면서도 문비는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속에 무언가가 차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형체 없는 그것이 그윽하고 따스하게 뭉클거리면서 심장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문비는 생모가 남긴 책들을 다시 꺼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권을 들어 펼쳤다. 그것은 시집이었다. 누군가가 수제로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집. 


 이 시집을 좋아했구나. 문비가 알 수 있었던 건 다른 책들보다 시집의 책장이 훨씬 더 닳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촉독이 아니라 그냥 눈으로. 


 수록된 시들은 고전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지난 시대의 명시들이었다. 문비가 학교에서 배웠던 시도 여러 편 들어 있었다. 


 설렁설렁 보며 넘기던 문비의 손이 멈추었다. 놀란 시선이 책의 아래쪽 여백에 화살처럼 꽂혔다. 거기, 점자로 남긴 메모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같다. 내내 어여쁘소서, 라니.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달려가는 마음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한 번 놓아 버린 나로 하여 전부를 잃으신 내 사랑. 나를 용서하지 마시고, 다시 어여쁘소서. 내내 어여쁘소서. 



 글귀에 담긴 마음을 알 듯 모를 듯했다. 서글픔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책장을 넘겼다. 



 나는 가끔 그런 꿈을 꿉니다. 꿈속의 나는 앞을 볼 수 있고, 부끄러운 내 얼굴이 비친 구리거울을 닦고 또 닦습니다. 손이 닳아 피가 흐르도록 닦으면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납니다. 내 거울 속에서 한없이 슬픈 정인 선생님. 선생님은 제가 밉지 않으신가요? 



 문비는 시의 제목을 보았다. ‘참회록’이었다. 늑골 사이 어딘가로 서늘하게 시린 감각이 밀려드는 듯했다. 문비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한 사람의 내밀한 속내를 허락 없이 엿본 것 같으면서도 한편 자신에게는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간을 그렇게 웅크려 숙이고 있던 문비가 천천히 몸을 펴고 또 다시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 나갔다. 



 이 시를 읽고 생각했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필요한 거구나 하고. 내 아가, 오늘 엄마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알았단다.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입덧이 너의 증거이긴 했지만, 제대로 실감이 나지는 않았어. 그런데 아까 낮에 네가 더없이 명확하게 네 존재를 증명했지. 엄마의 배를 톡 톡 건드렸어. 그건 너의 앙증맞은 손이었을까, 발이었을까, 혹은 동그란 이마였을까?


 그때 문득 깨달았어. 너를 향한 내 마음, 그런 마음이라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예쁘고 귀하고 동경할 만한 것이 별이라면, 나에게는 네가 유일한 동시에 가장 찬란한 별이니까. 


 말해 주고 싶었던 거니? 네가 있으니 엄마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고. 나에게도 피로 이어진 가족이 있다고. 

 너의 첫 태동을 느낀 그 순간의 환희를 엄마는 죽어도 잊지 못할 거야. 


 마침 낮잠을 자려던 참이라 다들 자리를 비켜 주었기에 나는 혼자서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어. 그래서 더욱 기뻤다고 고백하는 엄마를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늘 바랐거든. 너의 신호를 받는 첫 순간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기를. 


 네가 있어 나는 이제 진짜 내가 되었단다. 지금까지의 나는, 본디 그런 것보다 더 밝게 보이도록, 더 명랑해 보이도록, 더 생기 있어 보이도록, 더 강해 보이도록 나를 포장해 왔었어. 하지만 이제 너로 말미암아 나는 아무런 애를 쓰지 않아도 지향하던 바로 그 사람일 수 있어. 



 시의 여백이 모자라 뒷장으로까지 이어지는 메모를 읽는 동안 문비의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문비는 오랜 시간을 건너 이제야 자신에게 닿은 절절하고 애틋한 전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동안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시집의 메모는 그게 다였다. 문비는 다른 책을 살펴보기로 했다. 소설책 한 권의 갈피를 거의 다 확인하도록 메모는 발견되지 않았고 졸음에 겨운 문비의 고개가 자꾸만 꾸벅거렸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서는 아침까지 내처 잤다. 문비가 눈을 뜨니 작은 창이 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한파가 온다더니 밖이 몹시도 추운 모양이었다. 창유리에 하얀 성에가 두꺼웠다. 농담과 채도가 각각인 은색 물감만을 써서 온갖 식물이 우거진 정경을 그린 듯 아름다운 서리꽃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문비가 서리꽃 핀 작은 유리창을 폰 카메라로 찍었다. 


 예쁜 것 찾기 좋아하는 은성 언니가 보면 기뻐할 거야. 은성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라한이 연상되었다. 불현듯 그들이 그립고 그곳이 그리웠다. 암자에서 내려가면 집에 잠깐 들렀다 곧장 그리로 가야지. 운이 좋으면 새해를 함께 맞을 수도 있을 거야. 문비는 기대를 품었다. 


 아침을 먹고 공양주 보살을 도와 설거지를 끝내기가 무섭게 문비는 방으로 돌아왔다. 미처 다 확인하지 못한 책들을 낱낱이 들춰볼 작정이었다. 


 법당에서 사시 예불 올리는 소리가 날 무렵 두 권 째 소설의 확인이 끝났다. 여기에도 생모가 따로 남긴 글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벨칸토 발성법에 관한 책 한 권뿐이었다. 표지를 넘기는 문비의 손이 약간의 긴장감으로 굳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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