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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15. 2024

비관적인 독백


 책의 여백에 점자로 메모를 남긴다는 건 꽤 번거롭다. 책장 아래에 점자판을 끼우고 위에는 점간을 대야 한다. 점간의 사각형 안에 점필을 찍어 점자를 써 나가되 읽게 될 면의 뒷면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찍어야 한다. 읽을 때는 뒤집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다. 


 여백이 얼마 만큼인지 잘 기억해 두어야 책의 내용을 침범하지 않고 메모를 남길 수 있다. 이설이 남긴 메모는 아주 깔끔했다. 책 자체가 여백이 꽤 넓게 제작된 수제 점자책인 까닭도 있겠지만 이설의 찬찬하고 꼼꼼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천천히 책의 갈피갈피를 넘겨 나가던 문비가 동작을 멈추었다. 어느 단원이 끝나는 페이지의 꽤 넓은 여백에 메모가 있었다. 



 오늘 선생님은 내가 지난 번 받았던 검사들의 결과를 들으러 가셨다. 원칙적으로는 내가 가야 하지만 암자를 내려가기 여의치 않은 내 사정상 검사를 의뢰할 때 미리 부탁해 놓았다. 선생님이 나 대신 결과를 들으러 갈 것이라고. 


 어쩐지 좀 불안하다. 괜한 걱정이겠지만 선생님이 오셔서 결과를 말씀해 주실 때까지는 불안을 떨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불안해 하니 뱃속의 아이도 뭔가 감지되는 게 있는지 비교적 잠잠한 편이다. 


 마루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으면 따스한 가을볕이 온몸을 감싼다. 간간이 낙엽이 구르는 소리도 들린다. 코끝에 닿는 냄새가 커피 냄새를 닮았다. 나무와 단풍과 낙엽과 마른 풀의 냄새다. 이 냄새 때문에 가을이 조금 좋아졌다.



 문비는 급하게 다음 메모를 찾았다. 다음 단원의 끝 부분 여백에 있었다. 점자의 점들이 이전의 메모와 달랐다. 누른 압력이 일정하지 않았다. 심하게 눌러 종이가 찢어진 곳도 많았다. 문비는 이 점자들을 쓸 때 생모의 가슴에 일었던 혼란과 두려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어제 선생님은 제법 늦게 돌아오셨다. 나는 잠들어 있었고 아무도 깨우지 않아서 오늘 아침에야 선생님이 돌아와 계신 걸 알았다. 나는 곧바로 검사 결과를 물었고, 선생님은 다 괜찮다고만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믿었다. 믿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가 되니 문득 몇 가지가 의아했다. 


 검사 결과가 다 괜찮다고 하실 때의 선생님의 목소리, 평소와 달랐다. 짐짓 밝게 말씀하셨지만 평소보다 조금 높은 소리였다. 내 귀는 앞이 보이는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하다. 


 그리고 술 냄새. 선생님에게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어젯밤에 드셨겠지. 왜? 아마도, 아마도 검사 결과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분이 근 일 년 이상 입에도 안 대던 분이 왜?

 또 오늘 하루 종일 이런 저런 할 일을 만들어 바쁘게 지내고 계신다. 골치가 지끈거린다고 하시면서도, 아마도 숙취겠지, 굳이 저러시는 건 나와 조용히 마주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문비의 심장도 불길하게 둥둥거렸다. 심장이 소란할수록 문비의 숨과 몸은 가만해지고 옴츠러들었다. 이제 그만, 그만하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문비의 내면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어느새 문비의 손은 책을 들추고 있었다. 오래되어 누렇게 색이 바랜 책장이 거친 손길에 구겨지면서 마구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는 생각 같은 건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듯이 씩씩한 척 살아 왔지만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적이 있었다. 다행히 보육원에서부터 좋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앞 못 보는 고아로 사는 일이 만만했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으니까. 


 선생님과 교수님을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빛을 심어준 분들,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들뜨게 하는지 알게 만든 분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어리석었다. 빛, 꿈, 희망. 그런 것들이 나 따위에게 가당키나 한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제 가혹한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생명을 품고 있음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고통 속에서는 스스로가 낯설어진다. 특히 아이의 존재를 느낄 때마다 무서운 충동이 나를…….



 히스테릭하고 비관적인 독백이 생모 이설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무서운 충동’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날붙이가 되어 문비의 가슴을 찔렀다. 퍼즐이 맞춰지듯 예전에 엄마가 외할머니와 통화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어렵게 나에게 온 귀한 아이예요. 하마터면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던.’


 대화가 어떤 맥락이었는지 문비는 모른다. 어렸던 문비는 저 말도 별 생각 않고 흘려들었다. 문비가 다가가자 엄마는 조금 놀라면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문비는 추리해 본다. 


 무서운 충동의 앞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생모의 시각 장애가 아이에게 유전되리라는 검사 결과가.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질 뻔, 이 앞에는 필시 중대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무서운 충동이 실행으로 이어진 결과일까?


 문비의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했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내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걸 거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입술과 턱만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스님과 공양주 보살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비는 허청거리며 일어나 방을 나갔다. 법당 앞에서 스님을 부르는 문비의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졌다.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니? 우리 아기, 어디가 많이 아픈 게 아니니?”


 스님과 함께 있던 공양주 보살이 문비를 부축해 앉히고 투박한 손으로 조심스레 문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좀 있네?”


 대답 없이 멍한 문비를 염려스레 응시하던 공양주 보살의 눈길이 스님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일까요, 이 아이? 


 스님은 공양주 보살에게 잘게 끄덕여 보이고는 고요한 표정으로 문비를 건너다보았다. 


 “묻고 싶은 게 뭐니,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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