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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17. 2024

내부의 무언가가 조용히 꺼지다


 흥분과 긴장 때문에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문비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자, 따뜻한 걸로 입술을 좀 축이는 게 좋겠구나.”


 공양주 보살이 차를 따라서 권했다. 문비는 받아서 두어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무슨 검사를 받은 일 때문에 제 엄마와…… 생모가 변했다고. 반대로 변했다고요. 그 검사 결과가 나온 뒤에, 뭔가 사건이 있었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니?”


 담담한 낯빛을 유지한 채 스님이 되물었다. 공양주 보살은 커진 눈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고는 애꿎은 다관을 마른 행주로 슥슥 닦았다. 


 “공양주 할머니께서 찾아 주신 점자책에 메모가 있었어요.”


 문비는 솔직하게 밝혔다. 


 “그랬구나. 그런 일을 암시하는 흔적을 남겼구나.”


 스님의 말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꼭 알아야겠니? 그 일이 너에게 왜 중요한 거니? 다 지나간 일이고 너는 무사히 태어나 이렇게 잘 자랐는데. 고인이 된 사람들의 옛 이야기를 들춰내서 무엇 하려고?”


 “비록 양수 속에 떠 있는 미숙하고 연약한 존재였지만 저 역시 엄연히 그 일의 당사자니까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렴풋한 정황을 알아낸 이상 실상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저는 멋대로 나쁜 추측들을 하게 될 테니까요.”


 느리게 그러나 또박또박 대답을 내어놓는 문비의 눈동자는 침울하고 어둡게 흔들렸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을 피해가는 안정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진실이라면 그것이 일으키는 파란과 불티를 감수하면서라도 반드시 직면하는 쪽을 택한다. 문비는 후자에 속했다.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다.”


 씁쓸한 어조로 말하면서 스님은 정인과 설을 상기했다. 스님이 아는바 정인이나 설 또한 문비와 같은 부류였다. 


 “그 무슨 검사인가 하는 것의 결과 때문에 정인이와 설이가 다퉜지. 그 아이들이 다툰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다툼을 목도한 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끼어들지도 않았다. 다툴 때의 정인과 설은 똑같이 얼음장 아래를 흐르는 물이었다. 차가운 언쟁과 얼음 같은 냉전이 둘 사이를 오갔다. 


 “우리는 그 아이들의 인생에, 결정에, 살아가는 방식에 간섭하지 않았단다. 불제자이면서 속세와 끊고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지친 날개를 우리 처마에서 쉬는 그 아이들을 묵묵히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었으니까.”


 업이든 복이든 스스로 쌓는 것, 스스로 짓는 것이었다. 


 “엄마가 검사 결과를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을 거예요. 결국은 알려줄 수밖에 없었을 거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생모의 기록 속 ‘무서운 충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럴 게다. 더 이상 다투지 않게 된 시점부터 두 아이가 변했으니까.”


 밝음은 하염없는 어둠으로, 어둠은 필사적인 밝음으로. 


 입을 다문 스님이 눈을 감았다. 잠시 고요 속에 앉아 진실을 담아낼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중이었다. 문 옆에 앉은 공양주 보살이 아까부터 입속말로 내내 반복하는 ‘관세음보살’만이 유일하고 희미한 기척이었다. 


 문비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스님이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으므로.


 이윽고 스님이 눈을 떴다. 


 “말을 거의 잃다시피 한 설이가 서리 맞은 풀처럼 새들새들 말라가는 사이에 이르게 겨울이 왔지. 초장부터 추위가 매서운 겨울이었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데 정인이가 법당 문을 벌컥 여는 게 아니겠니?”


 법당 안에 설이 없음을 확인한 정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스님은 예불을 마저 올릴 상황이 아님을 예감했다. 


 “설이가 없어진 거였다. 정인이는 미친 사람처럼 설이 이름을 부르짖으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외투도 안 걸친 잠옷 바람으로.”


 스님은 황급히 뛰어나가 정인을 잡았다. 공양주 보살이 정인의 부르짖음에 놀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시린 한기가 순식간에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세 사람은 옷을 단단히 껴입고 아직 캄캄한 어둑새벽의 오솔길로 나섰다. 설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면서. 설이 혹한의 산중으로 나선 지 그리 오래지 않았기를, 늦지 않게 그녀를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행히 그리 멀리는 못 갔더구나. 설이는 길가의 마른 솔잎 더미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도 입술도 새파랗게 얼어서는, 몸을 앞으로 둥글게 말고, 양팔로 배를 감싸고. 너도 알다시피 오솔길 양 옆이 다 숲이잖니. 흰지팡이 없이 나무를 더듬으며 거기까지 갔나 보더구나. 두 손이 온통 긁힌 상처였어.”


 손이 뻣뻣하게 곱아 있고, 말을 하려 해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얼굴은 괴로운 그림자 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기 힘든 사람처럼 몽롱했는데, 그건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경증의 저체온증일 터였다. 


 “모르긴 해도 악몽을 꾸다 꿈결에 거기까지 간 것 아닌가 싶다.”


 스님은 부연했지만 문비의 판단은 달랐다. 생모를, 이설을 거기까지 이끈 것은 ‘무서운 충동’이라고. 그녀가 원한 것은 뱃속 아이와 함께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었으리라고. 


 불과 얼마 전 문비의 마음에 생겨났던, 연약하지만 포근포근한 무형의 공간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힘주어 오므려 쥐는 문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나의 생모는 그날 나와 함께 세상과 작별하려고 했어. 


 그날 그녀는 나를 포기한 거야. 버린 거야. 


 조용히 아주 조용히 문비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꺼졌고 그녀는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둡고 춥고 황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었단다. 아가.”


 지금의 문비에게 이런 말이 위로가 될 리 없었다. 문비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법당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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