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남생이 여관의 콤메르

by 화진


아침 안개가 떠다니는 강가는 고요했다. 말이 끊기고 나자 물소리와 발자국 소리, 발에 채인 풀이 스적대는 소리가 다시 두드러졌다. 숲에서는 부지런한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왔다. 소리들은 자연스럽게 뒤섞여 아늑한 배경음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시스는 소문으로만 듣던 콤메르라는 인물을 직접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자신이 가진 가장 귀중한 정보가 무엇일지 기억의 창고를 탐색하고 있었다.


라무스는 시스에게 본명을 쓰지 말라고 그리고 변장을 좀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를 해줘야 하는지 고심 중이었다. 시스는 현재 카푸의 누군가가 잡고 싶어하는 표적이었다. 라무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그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카푸와 텔룸을 비롯해 어쩌면 남생이 여관에까지 그녀를 잡기 위한 비밀스러운 그물이 드리워 있을지도 몰랐다.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춰 시스보다 몇 걸음 뒤로 처진 라무스는 오래지 않아 고심에서 벗어났다. 시스가 머리를 풀어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대충대충 하나로 땋아 다시 흐트러뜨려 부스스하고 지저분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프레케스 가에서 찾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말리티아도. 다시 그들의 새장 안에 든 새가 될 마음 따위 시스에게는 추호도 없었다.


머리 모양을 바꾼 시스는 뭔가를 찾는 듯 길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무슨 풀을 잔뜩 뜯었다. 그녀는 풀 한 움큼은 들고 있는 겨울 망토 안에 넣고 한 줌은 한쪽 눈 주위와 얼굴 여기저기에 문질렀다. 풀을 던져 버린 그녀가 멈춰 서더니 괴로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쐐기풀을 변장에 사용하다니. 효과는 탁월하겠지만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


그녀에게 괜한 참견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라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쐐기풀의 독이 그녀의 얼굴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텔룸까지 가는 동안에 쓸 노잣돈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니. 이것도 쓸데없는 생각이지. 저 잘난 여자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해결할 게 뻔한데. 그럼 난 이쯤에서 빠져 주지.’


라무스는 몸을 숙여 숲으로 이어지는 키 큰 풀의 군락 속으로 들어갔다.


‘……?’


쐐기풀이 유발한 가려움과 따끔거림에 익숙해진 시스는 문득 혼자라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라무스가 보이지 않았다. 강 쪽에도 숲 쪽에도 라무스의 모습이나 기척은 없었다.


“각자 갈 길 가자 이거지? 그래, 동감이야. 마침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시스는 냉소를 머금고 외친 다음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느덧 남생이 여관은 오르막길의 저 끝에 손에 잡힐 듯 우뚝 나타났다. 물론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다. 아직 한참 더 가야 한다. 그래도 시야에 명확히 들어오는 목표는 피곤한 다리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웃옷의 안감을 뜯어 그 속에 꿰매 넣었던 비상금을 꺼낸 시스가 뛰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비록 한쪽 눈과 얼굴 군데군데가 벌겋게 부어오르긴 했지만 시스에게는 붓지 않은 눈의 아름다움과 고고하고 가녀린 자태 그리고 애처로운 척하는 표정이 있었다. 남생이 여관의 일꾼 티키는 시스가 순금 조각을 내보이기도 전에 여관의 육중한 현관문을 기꺼이 열었다.


시스는 손쉽게 방을 잡았다. 그리고 곧 티키가 가져온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주했다. 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주는 일은 본래 하녀들의 일이었는데 티키가 담당 하녀를 구워삶아 자청한 거였다.


“저어 티키. 부탁이 있어요.”


부어 오른 얼굴을 부끄러운 듯 손으로 가리면서 시스가 말했다. 티키는 뺨이 붉게 달아올라서 멍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레이디 와니타.”


와니타는 시스가 댄 가명으로 앙켑세라가 기르던 앵무새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없는 그 앵무새는 항상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지껄이곤 했다.


남생이 여관에 젊거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온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티키를 이처럼 대등하고 친근하게 대해준 아가씨는 시스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티키는 그녀의 멀쩡한 담녹색 눈이 봄의 강 같다고 생각했다. 신록의 풍경을 담아내는 물빛의 신비가 그 눈에 있었다.


“콤메르 님을 만나게 해줘요. 만나게 해주면 나중에 사례할게요.”


“아…… 그거라면, 실은 제 능력 밖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주인어른께 레이디의 의사를 전해 올리는 것뿐이에요. 만나 주실지 어떨지는 주인어른의 뜻에 달려 있지요. 가서 여쭐 테니 아침 식사 들고 계세요.”


티키는 난처한 듯 한숨을 쉬며 방을 나갔다.


구운 생선과 신선한 과일로 배를 든든히 채운 시스를 늙수그레한 하녀가 찾아왔다.


“주인어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 오세요.”


하녀의 안내를 받아 시스는 정갈하고 품격 있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의 상석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사내가 손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정말, 콤메르 님이신가요?”


이렇게 쉽다고? 그럴 리가. 시스가 의심 어린 눈초리로 그러나 예의 바르게 사내를 건너다보았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속을 읽기 힘든 웃음기를 띤 채 사내가 온화하게 재촉했다. 시스가 의심하는 바와 같이 사내는 콤메르가 아니었다. 그는 남생이 여관의 관리인 아미쿠스였다. 콤메르는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 얇은 가벽 너머의 방에서 엿듣고 있었다.


콤메르는 믿을 만한 이의 소개장 없이 찾아오는 낯선 손님을 선뜻 만나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손님들이라면 누구라도 콤메르인 척하는 아미쿠스와 먼저 대면하게 되어 있었다.


아미쿠스가 손님을 상대하는 동안 콤메르는 가려내는 것이다. 손님이 거짓 정보를 팔아 알짜 정보를 빼내려는 협잡꾼인지, 가치 있는 정보를 가진 진짜배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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