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홈스쿨러의 일상
어제 잠자리에 일찍 든 아이들이 새벽 6시쯤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금쪽같은 엄마의 개인시간에 말이다. 두 오빠들은 크게 요란스럽지 않게 사부작 거리길래 평소의 기상시간까지 내 할 일을 이어 나가본다. 엄마 껌딱지 막내딸은 옆에 끼고.
"엄마 밥 줘."
중간중간 엄마의 할 일의 리듬을 끊긴 하지만 '나는 원래 방해받는 사람이다'라는 여유로운 정체성을 장착한 후라 어려움 없이 이른 아침상을 차려주고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줌으로 새벽예배까지 마치고 평소의 시간표대로 아이들과 오전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가정예배를 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집안일을 해치우고, 매일의 학습까지 마치면 오전 일과는 끝이다. 오늘은 이른 기상으로 무려 오전 8시쯤 오전의 모든 할 일이 끝났다. 오빠들은 자유시간의 확보에 환호성을 질렀다. 셋째만 컨디션이 3일째 저조하다. 전편의 글에서 엄마의 시간보다 자녀와의 시간을 선택하기로 글을 쓰고 난 이후부터다. 3일째 껌딱지 모드가 되어 오빠들과는 잘 놀지도 않고 엄마에게 안겨 있으려고만 한다. 두 돌이 안된 막내 따님은 하루 종일 놀아줘도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3일째 껌딱지 모드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내 시간보다 더 중요한 아이들과의 시간을 선택하겠다고 나 또한 굳게 결심했지만 3일째 엄마에게 딱 붙어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 슬슬 한계가 느껴진다. 내 시간이 필요하다!
오후에 에어컨 청소기사분들이 오셨다. 에어컨 내부에 곰팡이가 가득했다. 그 공기를 다 마셨다니. 한참 청소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신랑이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첫째가 반가운 마음에 흥분하기 시작해서 선을 넘으니 아빠는 다소 화가 났고 둘째는 아빠가 오면 함께 하기로 한 '동대문을 열어라' 놀이를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그 와중에 청소 작업이 완료되어 기사님들이 가신 후 바닥 청소를 마무리하려는데 둘째가 빨리 놀아달라고 난리다. 첫째와 아빠의 상태, 그리고 에어컨 청소 작업의 흔적들이 어지러운 가운데 엄마는 본능대로 청소를 선택해버렸다. 이 혼잡을 정리해야 해! 하는 본능. 자녀와의 시간을, 우선순위의 일을 선택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지만 3일 동안 진이 빠지고 말았다. 진이 빠진 김에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 선택해버렸다. 그 와중에 둘째의 상태가 이상하다. 둘째의 요구가 단순히 놀아달라는 요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둘째의 갈급함이고 '필요'였다. 자녀의 필요가 집안일에 밀려버린 셈이다.
크게 삐진 둘째는 울다가 소파에서 잠들어버렸다. 저녁시간이 살짝 지나 깨어났지만 둘째는 여전히 삐진 상태. 아무리 달래도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뒤늦게라도 달래지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타이밍을 놓치면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성격이 다르다.
그렇게 달래다 엄마가 눈물을 쏟은 이유
아이 옆에서 계속 달래며 잠잠히 기도하는데 문득 아이의 슬픔이 느껴졌다. 정말 주님이 아시는 아이의 슬픔을 나에게도 느끼게 하시는 것 같았다. 둘째에게 감정적으로 체벌했던 일. 그리고 손톱을 깎아주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했던 일이 동시에 떠오르며 오버랩되었다. 둘은 '상처'라는 의미에서 나에게 같은 일이었다. 손톱을 깎아주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한 일은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눈으로 보여서 그런지 더 마음이 쓰렸다. 그런데 아이를 감정적으로 체벌했던 일도 그와 같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상처를 입힌 일이었다고.
아이가 입은 상처들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이 느껴져 눈물을 쏟았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한없이 되뇌었다. 여전히 마음을 풀지 않는 둘째의 마음을 돌이켜 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더 늦기 전에 이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말라기 4장 6절)' 돌이키도록 기도할 수 있음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기 전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에베소서 6장 4절)'는 말씀을 깊이 깨닫는 자리로 이끄심이 감사했다.
엄마를 찾는 둘째의 요구에 나는 너무 자주 '나중에'를 말해왔다. 둘째의 마음에 얼마나 큰 거절감이 자리 잡았을지 적신호가 뜬 요즘에서야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3일 동안 너무 지쳤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선택하느라 내 시간이 전혀 확보되지 않자 나도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요구할 때 조금도 지체 없이 바로 선택해주길 바라는 아이 앞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택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아이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런 글을 써도 되는 걸까 고민하지만 글을 쓴 대로 살아가도록 일상의 순간순간을 주님께서 연출해주신다. 글을 쓰는 나 역시 글의 독자이고 글의 주인은 주님이셔서 그런 걸까.
에어컨에서 나오는 공기가 신선해졌다. 아이들과 잠자리에 누워있는데 그 공기를 마시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둘째는 기분이 풀려서 저녁도 먹고 엄마 아빠와 실컷 몸놀이를 하고는 누워서 아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육은 분위기이고 공기이고 호흡이라고 그랬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공기가 정화된 것처럼 오늘의 사건으로 우리 가정의 분위기가 리프레쉬되었다. 다른 것이 교육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가 교육이고 아이들은 그 가정의 분위기를 마시고 호흡한다. 나를 선택하신 주님의 사랑, 아이들과의 시간을 선택하는 부모의 사랑이 가정의 공기가 되도록 하자. 아이들도 엄마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누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