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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 May 25. 2020

내가 열심히 사는데 너가 왜 불만이야

행복지킴이의 열성적 참견

나는 열심히 살다못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원하던 박사과정을 합격하기 전이나 후나 이런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매일이 행복하게 살아야지'
'너가 힘든 건 현재 너에게 만족하지 못해서야'
'왜 본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아'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크게 콧방귀를 뀌어도 화가 나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노력을 들이는지 알기는 하는지, 그들은 그래본 적은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이러한 사람들을 나는 '행복지킴이'라고 부른다.


미리 말하건데, 이것은 목표를 설정하고 무조건 끈질기게 나아가는 것이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를 포기하고 꿋꿋하라는 꼰대의 훈수나 헝그리 정신도 아니다.


사실 이 '행복지킴이'와 건설적인 목표지향형은 정말 한끗차이이다.

일단 둘 다 현재의 자신에서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에 차이가 발생하는 흐름은 이렇다.

적절한 것을 충분히 축적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충분히 축적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고통이 수반될 때 그것을 감내하느냐 회피하느냐
그 두가지에서 '행복지킴이'와 '목표지향형'의 차이가 난다.


결국,

자신의 부족함이 본인의 자신감과 자기애에 도전해와도 그것을 과정으로 인정하고

이상적 자신과의 간극을 현실에서 줄이고자 계속 노력을 하느냐 (하더라도 그 걸 얼마나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노력하지 않음을 합리화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자신처럼 행복해야한다며 남을 깎아내리는데 에너지를 쏟는가가 그 차이가 된다.


이렇듯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문구를 내세워 자신의 평온함과 행복을 지키는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 난 아주 조금도 내 마음을 내주고 싶지가 않다.



또한 이것은 무기력, 불안, 자신의 말을 듣지않는 자신으로 인한 고통을 겪는 이들과는 결이 다르다. 

뭔가 잘 하고 싶은데 그 과정에서 큰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이들은 대체로

1) 사실은 마음이 동하지 않았거나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을 때 (호기심/진심/진정성, 그리고 지속/전향에 대한 지루하고 고단한 선택과정이 이어진다.)

2) 너무 큰 걸음을 한번에 내딛으려 해서 동기부족이나 실패에 대한 불안으로 압도되는 경우 가 많다.


성취하려는 이는 누구나 본인 행위의 결과를 한번쯤은 상상하고 제일 마음에 드는 상상을 이루고자 도전하는 이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것을 한번쯤은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두렵다고 불안하다고 계속 감정에 빠져있어서는 안된다.

남을 깎아내린다고 도움이 되는 바도 없다.


그저 필연적으로 불편하고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자기 수용과 자기 발전에 시간과 마음을 써야하는 것이다.


운동과 루틴도 중요하다. 몸을 움직이면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쉽기 때문이다.

감정은 내 몸에 일어나는 일부분의 작용에 불과하다.





꿈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듯 하다.


첫번째는, 이미 설정된 목표가 있어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
두번째는, 행복한 매일을 살다가보니 얻어진 것에 행복한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목표를 두고 다가가는 목표지향형이었으며 목표를 이뤄야 행복할 수 있었던 행복조건형이었다.

후자는 목표를 두고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는, 방향성이 반대되는 진행(현재)지향적 접근이다.


한 때, 이 목표지향적 태도와 현재지향적 태도의 사이에서 꽤나 곤혹스러운 적이 있었다.


"~하면 행복할거야." 현재의 불행감, 고통, 우울함은 견뎌내어져야하고 조건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가져보겠다는 취지. 목표지향적인 태도는 결과중심적이라는 점에서 행복조건절과 긴밀히 맞닿아있다.


때로 나는 목표지향의 의도가 '대상에 대한 진정성 있는 열망'인지 '그걸 따내서 한번 행복해보겠다'라는 불손한 마음인지 모르겠었다.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 허황된 것을 쫒느라 내가 현재를 너무 포기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너무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아닐까. 나 정말 괜찮은 건가.


그리고 행복지킴이들은 마치 후자가 틀렸다는 식으로 목표에 대한 결벽성을 요구했다. 그 목표, 속물적인 거 아니야? 그딴 걸 쫒느라 현재가 불행한 너가 행복해질 수 있겠어?


그들에겐 내가 꿈꾸고 노력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욕망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욕망을 갖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욕망이 타고나는 것인지, 심어지는 것인지, 내가 주체적으로 가지는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욕망을 갖고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획득된 지위와 돈, 명예의 남용이 비판되어야 한다.


내 분야에서 본다면, 그 고결하고 순수한 욕망으로 고고하게 노력하다가 성공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오늘을 살다가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박사과정에 가있다보니 좋은 교수를 만나는 일?

그것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이도 주변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 혹은 나에게 꼭 맞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자신을 잘 맞출 줄 아는 이들이다. 대학입시는 합격 혹은 불합격, 이분법적라 자연스럽게 성장하긴 어렵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에 원하는 것이 명확했다. 만약에 내가 아주 좋은 교육기관에서 내 연구주제를 풍부히 가르쳐주실 수 있는 교수님께 꼭 교육을 받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목표지향형보다는 현재지향형이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 이들이 참 많다. 그런데 사람들의 결은 참 다르다.


만약 이상과 현재에 간극이 있다면, 본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하고 열심히 하면 좋겠다. 원래 자기인정과 자기성장은 어려운 것이다. 각오를 하던, 열심히 하던, 용기내어 포기를 하던, 전향을 하던 남의 텃밭에 가하는 수동공격성은 자제해주면 좋겠다.


그래봐야 오늘의 자신이 행복해야만 하는 굴레에 빠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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