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옳은 일에 주저하지 않기
중학교 때 학교 재단 이사장의 횡령 문제로 전 학생이 등교 거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 학생들까지 학교의 횡령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학교를 지켜 내자는 마음으로 고군분투했다. 어머니 모임에서는 이사장 방에 들어가 고성이 오갔고 선생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적으로 이슈화 시켜 현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자 노력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고 아직 어린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겪게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셨다. 두사부일체의 영화를 보면 조폭이 관련된 이야기 빼고는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학교 이사장의 횡령 금액은 16억 정도였다고 뉴스에 보도됐었고 그 이상이라는 말도 많았다.
처음 등교 거부 시기에 무작정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좋았다. 횡령? 그게 뭐지? 학교 안 가면 좋은 게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했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 깨우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어린 나이, 그때만 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열정, 무모한 정의감 등이 꿈틀거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처럼 교육청 앞에 가서 같이 시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많이 알리고 그 사람들을 벌 받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글을 올려야겠다 생각했다.
교육청 사이트는 물론 청와대 게시판, 당시 세*이클럽 등 21년 전의 일이라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여기저기 학교를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현재 나는 이 학교의 학생이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
'우리는 이런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올바른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
이런 내용의 글을 반복해서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셨고 'ooo 학생' 좀 바꿔 달라며 본인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낯선 남자, 그것도 성인 남자가 차가운 말투로 딸을 바꿔달라 하니 걱정이 되셨던 엄마는 몰래 통화를 들으셨다. 당시 집 전화는 무선전화기와 유선전화기가 연결되어 있어 한쪽이 들고 있어도 반대쪽에서 들면 같이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옛날 사람 같다)
"여보세요 제가 ooo입니다."
"학생 청와대 게시판에 글 올렸죠? 여기 청와대 민원실입니다." (당시 비서실이라고 했음)
"네 제가 올렸습니다."
"학생 겁이 없어요? 이런 글 올리면 큰일 나요."
그 남자는 학생 신분으로 이런 글을 올리면 앞으로 큰일이 난다, 불이익이 생길 것이라며 중학생인 어린 나에게 협박 아닌 협박으로 겁을 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진짜 청와대에서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교육청 쪽에서 전화를 한 건지 당시 이사장 쪽에서 전화한 건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청와대 사람이라며 말해서 아직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엔 솔직히 움찔했다. 조금 무섭기도 했고 진짜 내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또 지기는 싫었다.
왜 올리면 안 되는지 학교의 일을 학생이 관심 갖는 게 나쁜 건지 되물었다. 그래도 상대방은 같은 말만 했다. "학생 그러다 큰일 나~." 도대체 뭐가 큰일인지 말은 해주지 않고 그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갑자기 수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좀 떨려서 엄마가 전화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못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반대쪽에서 들고 있으면 알 수 있는데 그때는 그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다. 속으로 엄마한테 엄청 혼나겠구나 했다.
"이 사람이 지금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oo야 더 올려!! 괜찮아!!."
엄마가 이렇게 얘기하니 그 사람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긴장이 풀리며 손이 떨렸다. 엄마는 처음에 내가 욕을 올리고 나쁜 글들을 올렸다고 생각하셨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글을 쓴 내용과 올린 곳들을 말씀드렸다. 무모한 짓을 했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엄마의 한마디에 떨리던 마음도 진정되고 그 사람 말처럼 큰일 날일을 한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디 애한테 협박하고 있어. 괜찮으니까 더 올려! "
엄마는 아직 어린 학생에게 설득과 설명 없이 화를 내고 협박하듯 말해 화가 많이 났다고 했다. 그날 저녁 퇴근하신 아빠에게 낮에 있던 일을 말씀드렸다. 차분한 아빠도 괜찮다 응원해 주셨고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등교 거부가 끝나는 날까지 글을 올렸다. 결국 이사장은 횡령죄로 벌을 받게 되었다.
내가 쓴 글은 프린트되어 학교에 붙여졌고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어 고등학교에 간 나는 그곳 선생님들 몇 분에게도 이름이 알려졌었다.
가끔씩 부모님과 이 이야기로 대화를 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딸이 잘못될까 걱정이 됐지만 잘못된 걸 바로잡고자 했던 건 잘한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옳지 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내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절대 없다. 나쁜 일을 하면 바로 잡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식이 하려고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묵묵히 믿고 지지해주는 것. 그 어떤 믿음보다 가장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