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어느 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을 때 남자 친구가 말했다.
"너는 상점 예절이 참 좋은 거 같아"
"상점 예절? 그게 뭐야?"
"어디 물건을 사러 가거나 식당에 갔을 때도 막하지도 않고 점원에게 예의 바르게 하는 것 같아. 편의점에서 계산할 때도 그렇고, 지난번부터 느낀 거야."
"그야 나도 일을 해봤으니까! "
대학을 들어간 후 아르바이트를 끊임없이 했다.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 형편도 한 몫했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 맘 편히 쓰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스무 살 9월.
학교 앞 돈가스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당시 돈가스 가격은 7000원! 그때의 물가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부르주아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며 웃스겟소리로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최저임금은 2200원이었으니까.
학교 앞이었기에 대부분의 고객은 학생들이었다. 또래의 손님들이 많았기에 작은 무례함에도 자존심을 크게 다쳤었다. 아마 서비스직에 대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던 것도 같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채워져 갈 때 여학생 세명이 왔다. 음식을 주문받고 옆 테이블을 치우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학생 한 명의 발이 의자 바깥쪽으로 나와 있었고 쟁반을 들고 움직이다 발을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며 조그마한 깍두기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국물이 여학생 한 명의 발에 튀었다. 흰색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연신 죄송하다 사과드리고 닦을 수건을 가지러 가는 등 뒤에 여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게 얼마 짜린데. 알바 주제에 조심 좀 하지."
"쟤가 뭐 그런 거 알겠어? 그러니 아르바이트하고 있겠지."
"닦아지겠어? 다른 데 가서 먹을까? 내가 욕 좀 할까? "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안 들리는 줄 알고 하는 말인지.
주변을 정리하고 한 껏 상한 마음으로 그 날 일을 마무리했다. 도저히 더는 일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만두겠노라 말씀드리고 후임이 올 때까지만 일했다. 첫 알바는 아니었지만 모욕감과 수치스러움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이 무뎌진 지금은 그냥 듣고 흘리거나 때려치울 각오하고 붙어 싸웠겠지만 당시엔 순진하고 어려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는 계속해야 하기에 호프집 서빙도 하고 주방에서도 일을 했다. 일을 할수록 조금 이상한 손님을 만나도 무뎌지게 되었고 어차피 해야 할 일 즐겁게 하자 생각했다.
"너는 어쩜 그렇게 항상 웃으면서 일하니?"
아직도 잊지 못하는 가장 좋았던 사장님이 늘 하시던 말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 즐거운 노래를 켜놓고 설거지도 흥얼거리며 하고 서빙도 스텝을 밟으며 총총 신나게 다녔다. 오히려 바쁠 때가 더 즐거운 때도 있었다. 불쾌하게 하는 손님을 대하는 방법도 많이 터득했다.
그렇게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다 대학 3학년, 친구의 소개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하는 환경도 깨끗하고 좋았고 지금까지 해왔던 아르바이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많았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책의 재미를 처음 알게 해 준 친구들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당시 일했던 영화관은 외부음식이 금지되었던 곳이다. 지금이야 영화관에서 맥주도 마실 수 있고 편하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지만 당시엔 소도시의 영화관이었기에 제약이 많았다. 영화관 내에서 판매하는 음식만 가능했고 술은 절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안내를 하는 파트여서 손님들이 입장하는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며 음식물의 소지 여부도 함께 확인했었다.
앞 손님의 티켓을 받아 보고 있는데 뒤에 있던 아저씨 한 분이 맥주를 드시며 티켓 확인도 하지 않고 들어가 버리셨다. (아빠와 비슷한 연배인 듯했다.)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급하게 매표 쪽에서 무전이 왔고 발권은 했으나 외부음식을 소지하고 있으니 확인해달라고 했다.
음주를 많이 한 것이 보이거나 술을 가지고 있다면 발권하지 않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입장하는 입구를 잠시 막아놓고 아저씨를 따라 올라갔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외부음식을 가지고 올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손님에게 교육받은 응대 멘트를 계속해서 말씀드렸다. 위층으로 올라가며 힐끗 나를 쳐다보신 아저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시 올라가셨다.
"손님, 저희는 외부음식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 맡겨 주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캔맥주가 가슴으로 날아왔다. 조금만 더 아래에 서 있었다면 머리를 맞았을 것이다. 마시고 있던 맥주를 던져 유니폼은 물론 바닥도 엉망이 되었고 내 멘탈도 와장창 무너졌다.
"안 먹으면 될 거 아니야 이 **년아."
재수 없다는 듯 험한 말을 내뱉고 아저씨는 다시 상영관 쪽으로 올라가셨다. 끝까지 응대 멘트는 해야 했기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에도 욕설이 들려왔다.
맥주캔을 집어 들고 내려왔을 때 같이 일하던 친구들의 걱정 어린 한마디에 순간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이렇게 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 속상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모님들이 이렇게 해서 돈을 벌었구나 하는 생각에 더 울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어디를 가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손님에게 무례한 직원들이나 제대로 되지 않는 서비스에는 쓴소리도 하지만 되도록 그분들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려고 한다. 그분들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일 테니.
상점 예절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나쁘지 않은 말인 것 같다.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도 소중하고 어디서나 갑과 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이 존재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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