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언니 그분 보셨어요?"
"누구?"
자리에 앉자 서주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아린을 불렀다.
"오늘 새로 온다는 작가님이요. 좀 전에 오셨어요. 언니 오면 한꺼번에 인사드린다고 하고는 잠시 나가셨어요."
인사까지야. 아린은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간단하게 인사만 먼저 하면 될 텐데."
아린은 솟아오른 못된 심보를 겨우 억눌렀다. 아마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하니 괜한 자격지심에 못난 마음이 고개를 빼꼼 들어 올리는 듯했다.
"엄청 잘 생겼던데요?"
서주의 말을 듣고 보니 정은이 왜 거울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잘생기면 뭐 얼마나 잘생겼을 거라고. 아린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서도 왜 자꾸 뾰족하게 생각하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누가 내 속마음 들여다보면 이중인격자라고 할 거야 아마.'
아린은 애써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작업실 문이 열렸다.
“어? 오셨네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인사하고 들어오는 남자.
훤칠한 키에 군더더기 없는 옷맵시. 아린은 서주가 말한 잘생겼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책상이 모여 비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 아린과 정은, 서주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정우라고 합니다. 웹소설을 쓰고 있고 시도 씁니다. 좋은 셰어 작업실에서 좋은 분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작업 중이실 텐데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우는 웃을 때마다 사라지는 눈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보통 작업실에 새 작가가 들어오면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충 인사를 나누고 작업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우의 인사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린이 박수를 쳐야 할지 반갑다고 일어나 악수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정은이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임정은입니다. 저도 웹소설을 쓰고 있어요. 스물여덟 살입니다.”
정은은 수줍은 듯 정우의 앞으로가 손을 내밀었다. 정은의 뜬금없는 스타트로 대학 첫 오티 때처럼 차례대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아 저랑 동갑이시네요. 저도 스물여덟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몸을 베베 꼬는 정은의 모습에 아린은 실소가 터질 뻔했다. 정은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던가.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막내 강서주입니다. 시나리오 작가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주의 인사가 끝나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아린에게로 향했다. 아린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하아린이라고 합니다. 서른네 살이고 소설을 쓰고 있어요. 반가워요. 잘 지내봐요. “
“선배님이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처음 들어온 기념으로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 근처에 카페가 있을까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정우는 바로 글을 쓸 생각은 아닌 듯 보였다. 아린은 ‘선배’라는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저희는 보통 여기 탕비실에서 커피 마셔요.”
“아, 그래도 오늘은 제가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
정은은 시무룩해하는 정우의 앞으로 다가가 일층 샌드위치 가게에서 사면된다고 했다.
“그럼 같이 내려가시죠. 아니면 제가 사 올까요?”
“저희가 좀 전에 내려갔다 와서..”
“그럼 제가 사 올게요.”
정우는 뭐가 신이 나는지 길쭉한 다리를 쭉쭉 뻗어 작업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정은과 서주는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 훈남훈남. 맞죠 언니? 너무 잘생겼어. 그런데 글까지 잘 써. 이 삭막한 작업실에 해피 바이러스가 들어오다니.”
정은은 두 손을 모으고서는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저런 표정의 정은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서주까지 정은의 손을 붙잡고는 맞장구쳤다. 잘생긴 것도 맞고 훈남인 것도 맞지만 아린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잠시 후, 정우가 들어오자 정은과 서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자리로 빠르게 돌아갔다. 캐리어에 넣어 온 커피를 각자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서주와 정은의 커피는 아메리카노인 듯했지만 아린의 앞에 놓인 건 라테였다. 아린이 의아한 듯 정우를 바라보자
“선배님은 라테를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라며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웃어 보였다. 아린은 라테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1층까지 사러 다녀온 그의 성의에 감사히 먹겠다고만 대답했다.
“글 쓸 때는 라테가 좋더라고요. 달달한 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주는 것 같거든요.”
그러고 보니 정우의 손에도 라테가 들려 있었다. 정우의 이야기를 듣던 서주와 정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걸 느꼈지만 아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아린은 답답한 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로 돌아가려는 정우를 붙잡았다.
“신춘문예 당선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어떻게요?”
아린은 아차 했다. 당연히 좋은 시를 썼으니 당선됐을 텐데 어떻게라니. 하지만 정우는 평온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운이 좋았죠. 써 놓았던 시들 중에서 골라서 보냈거든요. 그리고 사실, 메이저 신문사 신춘문예도 아니었고 신춘문예 연구를 많이 했어요. 내가 쓰고 싶은 시보다 심사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시를 쓰려고 노력했거든요. 당선됐을 때는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았지만 결국 제가 좋아서 쓴 시가 아니라 심사를 받기 위해 쓴 시었기 때문에 그리 행복하진 않았어요. 그러다 시집 몇 권 내고 나니까 짧은 시 안에 함축된 마음을 담기보다는 긴 문장으로 풀어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 어느 작가님의 웹소설을 읽고 감명받아 이 길로 뛰어들었고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니요. 소설을 쓰신다고 하셨죠? 그럼 신춘문예에 도전도 해보셨을 테고 궁금할만하죠. 더 궁금하신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세요. 아는 선에서는 다 말씀드릴게요.”
아린은 고마워요,라고 대답하고는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무례했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준 정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와 더 이상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정우는 웃으며 아린의 맞은편 책상으로 가 앉았다.
아린은 노트북 메모장을 열어 머릿속에 나열되는 단어들을 타이핑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 그들이 원하는 글. 그럼 어떤 공식이 있는 걸까? 메이저 신문사. 꼭 그곳에 당선되어야 하나? 심사를 받기 위한 시. 행복하지 않은 시.]
두서없이 나열되는 문장들을 바라보니 아린은 어지러웠다. 막연히 소설이 쓰고 싶어 뛰어들었지만 정우처럼 신춘문예 작품들을 연구해보지도 않았고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글이 어떤 글인지도 파악해보지도 않았다.
글을 쓸 거야, 글을 쓰고 싶어, 글을 써야만 해라는 생각만으로 지금까지 온 거니까.
아린은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정우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는 당연히 금연일 거고 혹시 흡연은 어디서 해야 하나요? “
정우의 질문에 아린은 정은을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서의 흡연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지만 탕비실 옆 작은 공간을 흡연실로 만들어 두었었다. 물론 대부분 *베이핑 정도만 할 뿐 연초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태우곤 했다. 베이핑까지 금지하게 된 건 정은이 담배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향이 강하지 않은 전자담배라도 정은은 바로 싫은 티를 냈다.
당연히 정우의 흡연에 대한 질문에도 강하게 반발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은의 반응은 의외였다.
“탕비실 옆에 작은 문 보이시죠? 거기가 흡연 구역이에요.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요. 옥상에도 흡연이 가능하고요. 거기는 흡연 공간이 따로 있어요. 여기 4층 주간 보호센터 어르신들을 위해서 공간을 마련해 주셨거든요.”
정우가 묻지 않은 정보까지 방출한 정은은 뭔가 한 건 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래요? 그래도 건물 안에서는 좀 그렇고. 옥상에 잠시 다녀올게요. 여기 흡연실에서는 베이핑은 가능하다는 거죠?”
“네 맞아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겼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정우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혹시… 같이 가실 분 계세요? 옥상 처음 올라가서 좀 뻘쭘해서요.”
정우의 말에 서주와 정은은 동시에 아린을 바라보았다. 셋 중에 흡연자는 아린뿐이었다. 아린은 주춤하다 이내 담배와 정우가 사다 준 라떼를 들고일어났다.
“저랑 같이 가요.”
정우가 잡아 준 문을 지나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흡연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한 13년?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잘 안되네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편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정우 씨 이쪽으로.”
아린은 정우의 넉살에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간 뒤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문을 열자 정우가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울이 만들어 놓은 옥상의 흡연실을 보고 난 후 나온 감탄사였다. 옥상 한 끝쪽에 투명 유리로 만든 부스와 바닥에 갈려진 인조잔디. 그리고 간이 테이블까지. 테이블에 파라솔도 있어 한 여름을 제외하곤 종종 이곳에 올라와 글을 쓰기도 했다. 흡연 부스 안은 재떨이는 물론, 공기 청정기와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다.
“일본 갔을 때 본 흡연실이랑 비슷해요. 깨끗하고. 저는 옥상에 있다고 해서 그냥 옥상 한구석에 재떨이만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건물주님의 배려죠. 사실 이 부스가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유요?”
흡연실 안으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인 정우는 궁금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아린의 손에 들린 전자 담배를 본 정우는 아린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이걸로 태우실래요?”
고민하던 아린은 정우의 담배 한 까치를 빼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초는 오랜만이네요.”
“그 이유가 뭐예요? 이렇게 멋진 흡연실이 만들어진 이유가?”
정우는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어낸 후 재차 물었다.
“다 태우고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해요.”
정우는 아린의 말을 듣자 급하게 담배를 태우더니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당장 얘기하라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아린도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는 흡연실을 나와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았다.
“싸움이 있었거든요.”
“싸움이요?”
*베이핑 : 전자담배를 피우는 행위의 신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