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샌드위치가 나온 후 정은은 하울에게 글도둑에 대해 얘기했다. 하울은 작가 협회에 당장 이 사안에 대해 얘기해야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장르를 불문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정은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울과 같은 반응일 것이다. 아린과 서주도 그랬고.
서주는 하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건네어 주었다.
손부채질을 하며 빨대를 뺀 후 그래도 입으로 부어버렸다. 마셨다는 표현보다는 부었다는 표현이 맞는 듯하다.
“나 참. 아무튼 그런 짓 하는 사람들은 정말 혼이 나야 해. 그런 비 양심적이고 작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있다니. 내가 도울 일 있음 언제든지 말해. 알겠지?”
정은은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리는 듯 하루 종일 구겨져있던 미간이 반듯하게 펴졌다.
“후우. 화냈더니 배 고프네. “
“이거 하나 드세요.”
아린은 세 조각의 샌드위치 중 하나를 하울에게 건네었다.
“내가 만들어와도 되는데. 고마워. 그럼 사양 않고. “
하울은 샌드위치를 건네받았다.
“오늘도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구나?”
“네. 전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요.”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하울은 입을 다문 채 한 참을 오물거린 후 남은 잔여물을 삼켰다.
“우리 집에 에그 샌드위치도 맛있는데.”
“알죠. 그런데 전 이것만 찾게 되더라고요.”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가 가장 맛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린은 먹던 것만 먹는 습관이 있었다. 늘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
대학 때는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마다 돈가스만 먹어 돈가스 킬러라는 소리도 듣곤 했다. 아린은 먹어 본 맛이 맛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걸 늘 꺼려했다.
처음 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먹었던 것이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였다. 처음 맛본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는 축 쳐져있던 아린의 몸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여전히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는 맛있지만 아직도 그날 먹었던 샌드위치 맛은 느껴보지 못했다.
레시피가 달라지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담엔 꼭 에그 샌드위치 먹어봐. 아니다. 오늘 샌드위치 한 조각 줬으니까 내가 담에 쏠게.”
“네. 그럴게요. 이제 정말 완연한 봄인가 봐요. 날씨가 따뜻해요.”
“그렇지? 나도 오늘 아침엔 가게 문을 전부 열어놨었어. 빛도 들어오고, 바람도 살랑살랑 들어오라고. 아참참. 깜빡할 뻔했네.”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박수를 두어 번 친 하율은 세 사람을 집중시켰다.
“이따 5시쯤 넘어서 새로운 작가 한 명 들어올 거야. 웹소설 작가라는데 시인으로 등단을 했었다고 하더라고. 신춘문예 당선자였대.”
신춘문예 당선자? 하린은 자신이 당선된 공모전보다 몇백 배나 큰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신춘문예요? 와 대단하다. 언제요?”
하울은 오늘 들어올 작가에 대해 짧게 말해주었다. 시집을 세 권 정도 냈다는 것, 그리고 현재는 웹소설을 주로 쓰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저랑 같은 장르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혹시나….”
걱정스러운 듯 정은이 하울에게 물었다. 좀 전에 글을 도둑맞은 일이 있었으니 신경 쓰이겠지.
“전혀 걱정 안 해도 돼. 전혀 다르니까.”
“전혀 다르다니요?”
“그 작가 남자거든.”
아린과 서주, 정은은 동시에 “아!”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연히 여성 작가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소재가 겹칠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그래도 정은 씨랑 대화가 잘 되긴 하겠네. 같은 웹소설이니까.”
웹소설은 보통 여성향과 남성향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 독자들이 즐겨 읽는 글을 여성향, 남성 독자들이 즐겨 읽는 글을 남성향이라고 칭한다. 보통 플랫폼도 여성향과 남성향으로 나뉘어 있고 소재들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런 웹소설 시장에 대한 작은 정보도 없이 뛰어들었으니 아린은 망할만했다고 생각했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셰어 작업실 역시 여성 전용, 남성 전용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지만 하울의 작업실은 글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샌드위치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새로 들어올 작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네. 이제 전 올라가야겠어요.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정은은 자리를 정리하고는 먼저 인사를 했다. 서주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지만 아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린이는 더 있다 가려고?”
“네. 오늘따라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조금 앉아 있다가 가려고요. 혹시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죠?”
“방해라니. 그러지 말고 노트북 가져와. 창가에 앉아서 사람들 구경해. 구경이라는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음.…. 사람들 관찰? 나도 가끔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하는 방법인데 꽤 좋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어서 상상하는 거지. 예를 들어 저기.”
하울은 팔을 뻗어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통화 중인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 남자는 지금 여자친구에게 샌드위치를 사다 줄 생각인 거야. 어떤 걸 먹고 싶냐고 물어보겠지.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사람은 샌드위치 얘기에서 보고 싶다, 언제 올 거냐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그러니 간간히 미소를 짓고 있겠지?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하는 거지. 나도 언젠가 드라마인가 영화에서 본 거야. 에이 설마 그게 되겠어? 했는데 생각보다 캐릭터가 빨리 집히더라고. “
하울은 늘 이랬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모두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거야 작가들이면 한 번씩은 해봤을 일이지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상세히 말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괜찮은데요? 그럼 저 올라가서 노트북 챙겨서 내려올게요. 창가자리 한 자리 차지해도 돼요?”
“얼마든지.”
하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린은 이미 문을 열고 나서는 서주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샌드위치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작업실로 올라가 노트북과 메모장을 챙겨 왔다. 노트북에 써도 되지만 아린은 직접 메모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끄적이다 보면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을까.
키보드를 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다급해진다. 글을 쓰는 속도가 높아지긴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글로 풀어내려고 하니 속도가 늦어지거나 갑자기 떠오르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곤 했다. 속된 말로 “삘 받으면”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들겨 대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속도를 조금 늦추기 위해 사용한 아린만의 방법이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빨리 쓰고 싶어도 한계가 있고 휘갈겨 쓰면 후에 알아볼 수 없으니 그것 또한 신경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평정심을 찾게 된다.
아린만의 속도 조절 방지턱이다.
아린은 테이블 아래 콘센트에 노트북 선을 연결하고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오른쪽에 메모장과 펜을 정리해 두고 카운터로 향했다. 하울은 편하게 앉아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아린은 그냥 앉아 있기엔 미안한 마음이었다. 아린은 블루 레모네이드를 한 잔 계산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엔 아르바이트생이 진동벨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바이트생이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그냥 부르시지.”
“괜찮아요. 아직 손님도 없고요. 파이팅입니다!”
눈웃음이 귀여운 아르바이트생은 작은 주먹을 들어 아린에게 내보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뜬금없지만, 글이 풀리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아린은 인복이 많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린은 천천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처음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바쁘게 어딘가로 걸어가는 남자.
‘정장을 입고 전화를 하며 바삐 걸어가는 걸 보니 아마도 거래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는 거겠지? 급히 약속을 잡은 터라 저 남자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을 거야. 얼핏 보니 땀이 흐르는 것 같은데. 오늘 계약이 성공해야 할 큰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아린은 눈의 담은 남자의 모습을 메모했다. 입은 옷부터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저 아주머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 같네. 오늘 저녁 메뉴는 뭘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아.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있지 않을까? 분위기가 꼭 남매를 키우는 것 같거든.’
생각보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린이 이 일을 한 두 번 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신이 났다. 하울의 조언 덕분이었을까?
아린은 꼼짝 않고 두 시간을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음료는 이미 바닥났고 센스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집중하는 아린 몰래 다가와 잔을 채워놓고 간 게 몇 번 되었다. 아린이 잔이 계속 채워진다는 걸 느낀 건 마지막 남은 음료가 빨대를 타고 쪼르륵 입으로 들어올 때였다.
“응? 시아씨. 혹시 계속 리필해 준 거예요?”
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감사합니다.”
아린은 창 밖에 던져놓았던 시선을 잠시 거둬들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울은 이미 가게를 나간 듯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허리 통증이 살짝 느껴졌다. 아린은 노트북과 메모지를 챙겼다.
“이제 올라가시려고요?”
“네. 여기 너무 오래 있는 것도 민폐고.”
“전혀 아닌데. 사장님이 가실 때까지 부르지도 말고 조용히 음료만 채워주라고 하셨어요. 혹시 마감 때까지 안 나가시면 가게 열어놓고 퇴근하라고. 하하.”
“아휴. 그 정도로 집중했나 봐요. 글 쓸 때는 집중력의 집자도 보이지 않더니. 고마웠어요 시아씨. 다음에 내가 꼭 보답할게요.”
아린은 시아에게 손을 흔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따뜻한 바람이 코끝을 지나쳐 갔다. 아린은 차에서 목베개를 챙겨가기 위해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에 잠시 들를 생각이었다.
“이 아저씨가 진짜. 뭘 잘했다고 삿대질이에요?”
주차장 입구로 걸어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도로 쪽에 주차장 입구가 있고 건물 뒤쪽에 주차장이 있는 이 건물의 구조 특성상 사람들이 입구를 막고 주차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안으로 들어가려는 차나 나오려는 차가 경적을 울려대거나 언쟁이 생기기도 했다. 하울이 안내문을 붙여두기도 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아니 그래서 비상깜빡이 켰잖아요!”
“아저씨. 비상 깜빡이가 암행어사 마패예요? 그것만 켜면 다 돼요? 살짝 앞으로 가서 주차하면 될걸 본인 몇 발자국 편하자고 지금 몇 대가 고생 중이에요? 전화번호라도 적어두던가!”
암행어사 마패라는 말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와. 표현력 대박인데? 적어놨다가 나중에 써먹어야겠다.’
아린은 노트북 위에 메모장을 올려 ‘암행어사 마패’라고 적어 두었다. 저 아주머니는 분명 작가 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아린은 상상해 보았다. 아주머니의 말에 감탄하며 두 분의 언쟁을 다시 관람했다. 싸움을 말려야 하지만 뭔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짜랑짜랑한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아저씨도 지지 않았다.
“암.. 암.. 뭐요? 아니 잠시 기다려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애초에 주차장인 거 알고 있었으면 잠시 뒤로 주차하고 걸어 나오면 될 텐데 본인만 바쁘고 본인만 편하면 다예요?”
아주머니 WIN.
아저씨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는지 에이씨라고 하며 차에 올라타 버렸다. 슬쩍 차가 나오는 곳을 보니 세 대 정도가 나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화가 날 만하구먼.’
아저씨의 검은 자동차가 떠나자 멈춰있던 차들이 하나 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밑에 무슨 일 있었어요? 소란스럽던데.”
아린이 작업실에 들어가자 서진이 목을 빼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또 입구를 막았더라고.”
“아오. 정말 싫어요. 맨날 입구 막는 사람들. 진짜 저런 사람들은 차로 밀어도 봐줘야 해.”
서진이 이렇게나 과격한 사람이었던가.
“세 대나 밀려 있어서 화가 많이 났었나 봐."
“진짜 세상에 이기적인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서진은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아린은 노트북을 책상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