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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un 07. 2018

너를 기억하는 방법

아침부터 서둘렀다. 딸이 일어나려면 2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냉장고에서 미리 만들어둔 마른 반찬과 김치, 김을 꺼내 식탁에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메모지에 몇 글자 끄적거렸다.

‘엄마 볼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간다. 아침 거르지 말고 꼭 먹고 학교 가.’

     

등산복을 입었다. 어제 준비한 배낭에 물 한 병을 넣었다. 발길이 왜 이곳으로 향했는지 모르겠다. 기억 속 이곳은 멈춰있다. 어둠을 무섭게 몰아내며 쉼 없이 움직이던 뜨거운 열기를 기억한다. 어린 아이에게 이곳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휩싸인 환상 가득한 동화의 나라였다. 현란한 불빛으로 유혹하는 밤의 세계, 놀이기구의 스피드와 스릴만큼 찰나의 쾌락과 흥분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날이 있었다.

 

지금 여름의 유원지는 예전 화려했던 자취는 사라지고 파티에서 돌아온 부엌데기 신데렐라의 모습처럼 초라하고 쓸쓸했다.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은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메마른 이파리에 비쩍 마른 나뭇가지가 아무렇게나 뻗어 있었다.

유원지 입구에 있는 매표소로 갔다. 낡아서 누렇게 변한 입장료와 놀이이용 가격표가 반쯤 찢어진 채 붙어 있었다. 유원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갑자기 유원지로 들어가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마치 어린 시절 금단의 규칙을 어겼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죄의식 한 편으로 강렬하고 짜릿했던 쾌감의 기억이 유혹하는 것처럼.

 

매표소를 돌아 옆쪽으로 가보았다. 쓰러진 나뭇 가지와 풀들이 엉켜있는 덤블 틈새로 가시철망이 보였다. 그곳에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몸이 들어가긴 충분했다.


유원지 안은 언제 먹었는지 모를 음식찌꺼기와 음료수 병, 과자 봉지가 바닥은 물론 벤치 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버려졌을까? 유원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예전엔 무척 크게 보였는데’ 사람의 발길도 끊긴 자리에 아직도 버티고 서있는 표지판이 산전수전 다 겪은 얼굴로 왼쪽은 휴식할 숲과 놀이기구, 오른쪽은 동물원이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앞쪽 길로 쭉 가면 보트를 탈 수 있는 작은 호수가 나올 것이다.

 

무얼 확인하러 왔을까?  바다라 할 수 없는, 바다 쪽을 향해 멀리까지 펼쳐진 고립된 땅, 폐허가 돼버린 이곳처럼 그날 있었던 기억도 폐쇄돼 버린 것 같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계를 보았다. 이곳에 온지 무척 오래된 것 같았는데, 겨우 열한시밖에 안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곳에선 시간의 의미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까마득한 태곳적, 원시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쭉 나아갔다. 작은 호수가 나왔다. 선착장에는 낡은 보트와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플라스틱 오리모양의 배들이 방치된 채 널브러져 있었고, 멋을 부려 만들어 놓은 부교는 거의 부서져 있었다. 호수는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물은 고여있는 듯했지만 어딘가로 흘러가는 듯도 했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인데,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부유물이 떠다니기는 해도 어디서 왔는지 작은 물고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정지된 기억은 환등기 속 장면처럼 서서히 미끄러져 나왔다. 그날 뜨거운 한 여름의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저녁 무렵, 광기와도 같은 흥분이 모두를 사로잡고 있었다. 두 아이는 어른의 손을 놓쳤다. 너무 신기한 게 많아 앞으로 계속 나가면서 큰 아이는 작은 아이의 손을 놓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은 아이는 호수에 둥둥 떠다녔다.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배처럼 떠나가는 걸 보았다.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큰 아이는 물을 찾았다. 호수든 강물이든  흘러 흘러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호수의 수면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수면은 결코 평온하지 않음을 안다. 수면 밑은 온갖 생명이 에너지를 뿜고, 처절한 생존을 위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호숫가로 내려갔다. 수면을 내려다보니 의외로 물이 깊은 듯 시커멓게 보였다. 물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엄습했다. 손으로 수면을 힘껏 휘저었다. 파문이 일며 물은 왜곡된 영을 만들어냈다. 짧은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일그러졌다 펴졌다 한다. 수면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밤새워 쓴 종이배 편지를 꺼내 호수에 띄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작은 새 한 마리가 서서히 떠내려가는 종이배 위를 동그랗게 돌다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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