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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Oct 17. 2020

 길은 몸뚱이를 길게 쭉  뻗고,  발길이 닿는 것만이 존재 이유인 듯, 가로수 아래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낮의 수많은 사람들의 지나간 발자국만큼 피곤으로 수척해졌을 텐데 단단한 인내로  버티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때, 길과 어우러진 주변 풍경은 다채롭고 풍부한 표정으로 바뀐. 불빛 비친 나무는 스산한 바람에 몸을 떤다. 아마도 곧 떨굴 이파리들을 생각하겠지, 나무도 길도 알고 있다. 수북이 쌓인 잎들이 차가운 바닥을 뒹굴다 부서져도 제 갈길을 찾아간다는 것을,  새로운 생명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길을 걷다 벤치에 잠시 앉는다.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깬다. 마지막 수업이 늦게 끝나고,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해 걷다 보니 고즈넉한 밤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같은 길을 오간 날들이 얼마나 됐을까, 아이와 처음 수업을 시작한 게 초등 2학년 때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귀여운 아이가  지금 중3이다. 가을과 함께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 질문에도 부쩍 답이 줄고, 눈도 잘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니 함께 한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거리감마저 느껴진다.

 다시 길을 걷는다.  길이 있어 걷고,  걸으면서 생각하고,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이 순간만은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걷는데 집중한다. 천천히 또는 격렬하게 걸으면서 쌓인 피로와 불쾌한 감정들을 털어버린다.  단추를 잘 끼려는 의무감에 자칫 경직될 수 있는 아침 길과 달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밤길은 부드럽고 편안한 안식을 준다.

  어디나 있지만, 내가 가는 길만을  뿐이다. 어떤  목적갔건, 우연히 헤매게 됐건, 처음은 모두 낯설었다. 시간이 흐르고 낯선 길들이 익숙해질 때쯤 또 다른 길에 대한  동경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러면 두툼하고 편한 신발을 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들을 찾고,  또 걸을지 알 수 없다. 올 해를 알리던 종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한데, 또 한 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날이 코 앞에 다가왔다는 것이, 일 년이란 시간이 가볍게 읽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처럼 쉽고 간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라 해도, 걷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찰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길이란 걸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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