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남자가 탁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가슴 깊이 새겨져 잊을 수 없는 어떤 사건과 여자의 눈동자, 그리고 심연에 묻어 둔 사랑의 기억을 활자를 통해 되살리려 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영화는 25년 전 한 여자의 강간 살해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검사보 벤야민 에스포시토가 그 사건을 소설화하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에스포시토는 첫 눈에 반했지만, 그 감정을 마음속에만 간직해 왔던 자신의 상사 이레네와 기차역에서 이별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사랑의 기억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몽환적 분위기를 띄고, 막 떠나는 기차에 올라탄 남자, 헤어지기 싫어 기차를 필사적으로 따라가는 여자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차창 유리에 서로의 손을 마주 댄 순간, 비정한 기차는 연인을 갈라놓고 매몰차게 떠나간다.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는 아르헨티나 영화로 201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영화에서 눈은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래서인지 남미배우들의 강렬한 눈빛 연기가 더욱 돋보였다. 결국 눈이 중요한 단서가 돼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눈은 '마음의 창'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25년 전 에스포시토는 신혼의 젊고 아름다운 여교사 릴리아나 콜로트가 강간당하고 살해된 현장을 목도한다. 발가벗긴 채 이상한 자세로 누워 처참하게 죽은 여자의 크고 아름다운 눈은 경악과 공포 자체였다.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에스포시토는 여자의 눈을 잊지 못한다.
그후 사건은 범인도 잡지 못한 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간다. 그때 에스포시토는 죽은 릴리아나의 남편 리카르도 모라레스가 법의 외면 속에 홀로 범인을 잡기 위해 매일 기차역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죽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해서 그 사건을 재수사하게 된다.
상사인 여검사 이레네와 검사보 에스포시토, 그의 동료 산도발의 활약으로 결국 범인 고메스는 잡힌다. 고메스를 잡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앨범 속 사진이다. 범인은 릴리아나의 어릴 적 고향 친구였다. 모라레스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그는 연모의 눈빛으로 릴리아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긴 에스포시토와 동료는 천신만고 끝에 그를 찾아 진실을 밝혀내고, 종신형을 받게 만들지만 고메스는 풀려난다. 그가 정부의 게릴라 작전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부패한 독재정권 아래 있었다. 권력의 시녀가 된 법 앞에서 이레네와 에스포시토, 그리고 죽은 여자의 남편은 절망한다. 오히려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고메스가 그들을 위협한다. 가장 가슴 조였던 장면은 이레네와 에스포시토가 엘리베이터를 탄 후 문이 닫히려는 순간 고메즈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 와 권총을 꺼내 무언의 협박을 할 때이다. 그 후 협박은 실제 이뤄진다. 에스포시토 집에서 법원 동료 산도발이 살해된다. 결국 에스포시토는 자기 대신 죽은 동료 산도발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느끼고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은퇴를 택한다.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이레내와 헤어진다.
처음 그가 회상하는 이별장면이 그것이다. 에스포시토는 이레네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 여자도 그가 사랑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코넬대 출신이고 그는 고졸출신, 학벌뿐만 아니라 집안, 모든 면에서 그녀는 자신에겐 너무 과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학벌, 신분,가문이니 하는 배경조건들이 지겹도록 인간을 따라 다니며 순수한 관계를 방해해 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영화는 범죄와 멜로, 현재와 과거가 잘 어우러져 흥미로웠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과거 사랑에 대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고, 세월이 흘러 연인을 다시 만난 그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 답은 영화가 끝날 때쯤 알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맥스, 대반전이 있었다.
에스포시토는 죽은 여인의 남편이 궁금했다. 아직 부인에 대한 사랑이 여전한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부인을 그리워하는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의 사랑에 따라 자신의 사랑도 결정된다는 듯이... 결국 그를 찾아간다.
외딴 집에 홀로 외롭게 살고 있는 모라레스,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는 죽은 부인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남편은 25년의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에스포시토는 그가 부인을 잃고 그 공허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모든 걸 잊으라면서 더 이상 살인범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죽였다고, 하지만 에스포시토는 그의 눈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쉽게 부인을 떠나보내지 않을 거란 의혹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모라레스의 집으로 돌아가 그의 동태를 살핀다. 그리고 마침내 동물처럼 사육되고 있는 살인범의 충격적인 모습을 본다. 에스포시토를 발견한 모라레스는 깊고 공허한 눈으로 부르짖는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종신형이라고.” 모라레스는 날마다 살인범을 보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영화를 통해 인간실존의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사회와 법으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의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 것인지, 더구나 범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고, 정의도 실종된 사회에서 개인의 힘은 얼마나 무력한지 영화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법을 초월한 행동이다. 부조리한 법은 부조리한 인간을 잉태한다.
에스포시토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지만 내면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진실한 사랑이 끝내 악을 이긴다는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