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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29. 2018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마침내 '죄와 벌'을 다 읽었다. 1~6부와 에필로그, 작품해설까지 거의 1000쪽에 달하는 분량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읽자니 꽤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작품이 주는 의미가  특별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고요를 깨는 뇌성처럼 평온한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죄와 벌」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묵직하고 심오한  문제의식을 주어 인간 실존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도스토옙스키처럼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는 드물다. 그는 인간 내면의 심층을 파고들어 가장 추악한 인간 본성을 가차 없이 들춰내지만,  종교적 믿음으로 인간 구원의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잔인한 천재, 위대한 심리학자,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작가, 실존주의자, 부조리 작가, 등 많은 수식어가 동반되는데, 이는  그의 삶의 궤적이 보여준 지난한 인생 역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보통 사람이 겪기 힘든 운명적 사건을 여러 번 경험한다. 도스토옙스키는 18살 때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큰 격에 빠진다. 또한 27살 때 정치 비밀모임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처형 직전에 감형되어 시베리아에서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지병인 간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의 셋째 아들도 그와 같은 병을 앓다가 죽는다. 말년에는 도박 중독자로 처참한 경제적 빈곤을 경험하고 삶의 밑바닥을 전전한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의 풍부한 소재거리가 됐다. 매 순간 위기로 점철된 그의 삶이 투영된 대부분의 작품은 어둡고 음울하며, 불안하고 위태로운 인간의 실존을 그리고 있다.


「죄와 벌」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소설은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처음 뾰뜨르 대제가 근대화의 상징으로 만든 아름다운 계획 도시는 농노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리면서 무질서와 혼란의 도시로 변한다. 특히 센나야 광장과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은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터전이 된다.

작가가 뻬쩨르부르그  뒷골목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곳에 살았던 생생한 경험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작가는 뻬쩨르부르그의 배경과 인물의 내면을 긴밀히 연결시켜 사회와 환경이 개인 정신과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심도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음울한 도시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과 맞닿아있다. 뻬쩨르부르그의 환상과 현실의 괴리만큼 몽상가인 젊은 법학도의 꿈과 현실의 거리도 멀다. 뻬쩨르부르그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듯 화려하고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실상은 허위로 가득 찬 절망의 도시이다. 절망의 도시는 섬세한 감수성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청년의 정신을 병들게 하여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한다. 의 꿈과 야망은 가난의 벽에 막혀 좌절되고, 도처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숨 막힐 듯 무더운 7월의 날씨도 그의 우울과 절망을 부추기고 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그는 관 속 같은  하숙집을 나와 뻬쩨르부르그 거리를 걸으며 어떤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전당포 노인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는데, 자신의 생각이 추악하고 비열하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은 선을 위해 악을 처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업적을 이룬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 대의를 위해 살인을 하듯 자신도 세상에 백해무익한 노파를 죽임으로써 많은 선행을 베풀 수 있다면 도덕적 관습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실행에 옮긴다.


오랫동안 망설이던  신념에 대한 실행은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와 어머니의 편지로 인해 촉발된다. 그는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가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 을 알게된다. 그리고 오빠의 장래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동생 두냐를 생각하면서 결심을 실행에 욺긴다. 그러나 그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면서 엉겁결에 죄 없는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따까지 죽이고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는 자기희생으로 타인을 구원하는 인물이다. 절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살해당한 노파의 동생 리자베따와 마찬가지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독실한 종교적 믿음으로 타락한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숭고한 정신을 지녔다. 그녀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고백했을 때 비난하지 않고 그의 불행을 함께 한다. ‘나자로의 부활’ 을 읽어주면서 그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부활하도록 이끌어 준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침내 자수를 한다. 소냐의 진실한 사랑과 희생정신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예심판사 뽀르피리의 인간적인 대우와 관대한 처분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누이는 믿음직한 친구 라주미힌과 결혼을 한다.


에필로그에서 소냐는 시베리아 교도소까지 라스꼴리니꼬프를 따라가서 뒷바라지한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자기학대와 비하로 고통을 감수한다. 하지만 차츰 소냐의 순수하고 거룩한 영혼에 감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죄와 벌」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대한 내용과 함축된 의미가  깊고 풍부해 무엇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인물과 함께 고뇌하고, 안타까워하며, 내면의 아픔을 이해하는 매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것이 죄인이기에 더욱 그렇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좌절과 패배의 감정은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을 반증하기에 이율배반적이다. 자기모멸과 애증으로 고통받는 인물의 불행이 전염되는 듯해 우울했다. 소설의 인물이지만 그가 마치 현실의 인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며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


진정한 구원은 죄를 짓고 벌을 받는 물리적 차원이 아닌, 죄의 멍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서의 죄와 벌은 작가 인생의 행보를 볼 때 그 의미가 단순치 않다. 도스토옙스키가 현실에서 지은 죄는 극히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부분이다. 실제 정치적 이유로 시베리아에 가서 벌을 받게 된 그는 죄와 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노파를 살해한 것을 합리화한다. 영웅이 저지르는 살인은 대의를 위한 것이기에 허용해도 된다는 영웅주의 사상에 경도돼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살인이건 목적과 명분만  달랐지 본질은 같다. 생명에 대한 훼손이다. 그럼 벌은 어떤가? 무게가 다 다르다. 그러면 죄값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인간은 어떤가?  과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있던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여기서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없다는 심오한 문제의식을 인지하게 된다.


소설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시베리아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자신의 죄를 진정 뉘우치지 않은 것은 세속적인 단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자신의 죄에 대한 판결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소냐에 의해 죄를 뉘우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근원적 구원에 대한 믿음이 내재돼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

인간의 원죄' 라는 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신의 구원만이 인간을 죄와 벌에서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선 어떨까,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을 때 물리적 벌을 받는 것만으론 죄책감이란 벌에서 헤어날 수 없다. 상처 입은 양심은 싑게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은 어떤 면에서 마음 속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신을 대하듯 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죄와 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통해 숙명이라는 죄목으로 고난이라는 벌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실존의 허무를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소냐가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사랑과 희생이라는 휴머니즘을 실천해 사람들의 영혼에 안식을 준 것처럼 가치 있는 삶을 통해 실존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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