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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May 09. 2022

망중한 한중망

결국 다시 시간에 대한 얘기다. 육아만큼 바쁜 일도 드물 텐데 어쩐지 한가하기도 하다. 망중한(忙中閑)이면서도 한중망(閑中忙)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아이와 씨름할 때에는 더없이 바쁘다가도 아이가 낮잠을 잔 지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더없이 한가하다. 육아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비교적 한가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헷갈린다.    

  

아이의 낮잠 시간과 저녁잠 시간이 길어지니 나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빠르게 커 가는 만큼 나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을 텐데 나도 간절히 내 시간이 갖고 싶어졌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아이의 수면습관이 잡히고, 밤에 깨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도 나를 위한 단 1시간을 온전히 찾기가 쉽지 않다. 아이와 살을 맞대고 있는 이상 온전한 1시간은 쉽게 찾아올 것 같지가 않다. 친정 부모님이나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을 과감히 떠나는 방법 외에는 파인애플 속살만을 발라낸 듯한 깨끗한 시간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조 양육자들을 마음껏 부려먹는 사치를 매일 누릴 수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조각난 시간을 있는 힘껏 모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소한 계기가 나를 큰 결심으로 이끌었다. 며칠 전 엄마는 우연히 사찰음식에 관한 동영상을 보다가 연근으로 전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배웠다며 연근을 두 개 사 오셨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연근이 우리집 밥상에 올라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의 흔한 도시락 반찬이었던 연근 조림도 단 한 번도 싸간 적이 없다. 요리는 단순했다. 연근을 깨끗이 다듬은 다음 강판에 연근을 갈아 간을 하고, 프라이팬에 굽는 것이 끝. 그런데 사각거리는 식감과 기름과 어우러진 연근 맛은 일품이었다. 40년 만에 연근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지나쳐 온 매력적인 식재료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니 괜스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엄마의 도움 없이 연근 전을 다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이가 자는 시간, 혼자노는 시간, 남편과 노는 시간 틈틈이 연근을 갈았다. 그리고서는 전을 부쳤다.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여 남편에게도 전 부치기를 시켰다. 그렇게 연근 전이 완성되었다. 맛있었다. 한순간의 객기였는지 모르지만 연근 전을 정복하고 나니 다른 사찰음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찰 요리책 한 권을 주문하고서는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나씩 만들어보자고 호기롭게 제안했다. 시작은 연근 전이었을 뿐인데 조각난 시간을 이어 붙이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의미 없었던 찰나같은 시간들을 소소한 목표를 중심으로 이어 붙여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재미는 생각보다 컸다. 결과물이래야 연근 전이나 짧은 소설집 완독 정도의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또 누가 알겠나. 이런 시간이 모여 사찰음식 전문가가 될지!     


요 며칠간 아이는 저녁 9시에 잠이 들어 밤 12시까지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곤히 잤다. 나에게도 3시간이란 귀하디 귀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흘려버렸다. 그다음 날도 3시간의 온전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이번에는 나의 집중력이 딱 30분밖에 되지 않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가 곧 깰 것이란 생각에 쫄깃한 긴장감과 함께 전전긍긍하다 3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것이다. 마치 신기루같은 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다시 내가 옆에 없으면 아이는 밤에도 자주 깼다. 아직은 나에게 허락된 것은 몸통없는 자투리 시간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에는 마음 한번 쓸어내릴 여유 정도는 갖고, 조금이라도 시간의 틈이 생길 때는 가능한 부지런히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육아전쟁에서 행복하게 살아남는 쉽지만 쉽지만은 않은 지혜일 듯하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야 앞으로 차차 길어질 나만의 시간에 무엇을 할지 미리미리 고민해 놓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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