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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Jun 12. 2022

삶의 저변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것이 과연 살만한 것인지에 관한 유일한 질문은 우리에게 충분한 삶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 올리버 웬델 홈즈 2세 -



꼭 같은 내 인생인데 하루는 내 삶의 저변이 한없이 쪼그라들었다가 또 하루는 한껏 성장한 것 같다. 내 마음속에서 삶의 저변이 좁혀졌다 넓혀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인생의 다양성과 경험치를 더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빠의 마지막 항암이 잘 끝난 덕에 부모님이 잠시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게 되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일주일 정도의 짧은 고향행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남겨졌고 적적한 시간을 친구들을 만나면서 보내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일주일 동안 만날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를 찾기 위해 머릿속에 익숙한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평일에 일을 하는 친구, 가볍게 놀러 가기에는 너무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 다른 일로 바쁜 친구를 제하고 나니 아무도 없었다. 서글펐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확해지자 그 적막한 현실을 불태워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그 일주일 동안 비대한 아들을 둘러업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저녁에는 다리가 아파 더 이상 걷지 못할 만큼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 9시에 아들과 함께 신생아처럼 잠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며칠을 그렇게 쏘다니고 나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닌데 아들과 단둘이 나선 나들이는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초여름 거리를 걷는 사람들만 보아도 싱그러웠다. 그리고 더 이상한 일은 나 홀로 나들이로 계획한 일에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에바 알머슨의 전시회를 예약해 두었는데 전시회 전날 정말 오랜만에 한 친구가 연락이 와서는 본인도 그 전시회를 가겠다고 했다. 아마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침에 일어나서는 택시로 한 시간 걸리는 그 전시회를 당연한 듯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오기와 용기 그리고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지인과의 약속에 이끌려 전시회에 무사히 도착했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은 전시회장은 적당히 활기가 있었고 아들도 즐거운 듯 전시회장을 쏘다녔다.     


그날 늦은 오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엄마들이 채팅창으로 대화를 주고받다가 의기투합하여 한 집에 모였다. 육아에 지친 서로를 응원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간식을 싸들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다행히 용산에 다녀온 나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고 네 명의 엄마, 네 명의 아이들이 함께 모이니 잔치집이 따로 없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따로 또 같이 놀았는데 가끔 장난감 하나를 두고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서로를 신기한 듯 탐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육아라는 큰 산을 넘고 있다는 그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도 엄마들의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다.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하고 있는 일도 모두 제각각인데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공감하고 걱정했다. 마치 여러 물줄기가 하나의 웅덩이에서 만나듯 언젠가는 또 다른 길들을 떠날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함께였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친구를, 지인을, 사람을 찾아 헤매었건만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막상 길을 나서니 새로운 인연들이 다가온다. 더러는 오래된 인연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언제나 새로운 직업을 꿈꾸며 현실을 버티곤 했는데 육아 또한 새롭고 경이로운 직업이라는 데 뒤늦게 생각이 닿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직업으로 인해 느슨해져 버린 인연도 있으나 더 다채롭고 새로운 인연들과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야말로 하루는 인연을 잃고 하루는 인연을 얻는 이상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내 인생에 충분한 삶이 있는지 물어본다면 비루한 삶이지만 충분한 삶을 위해, 삶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평범한 보통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내 단순한 인생에 가장 이례적이고 신비로운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함께 가꾸는 법을 익히고, 새로운 인연들을 자연스레 만나고, 나의 복잡 미묘한 내면을 마주 대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도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지만 내 삶의 저변은 조금씩 커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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