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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Jun 21. 2022

포항 여행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 세 명이 오롯이 함께 한 1박 2일간의 기차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세명만의 여행은 아니었고 포항에 사는 남편의 사촌형 부부를 만나 뵈러 가는 짧은 일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 일정을 짜야한다는 부담감 없이 제시간에 몸을 기차에 싣는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포항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심지어 여행 전날 처음으로 아이 간식으로 빵을 구워보았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매진이라 예약을 걸어놓은 KTX 기차표도 여행 전날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고, 출발 15분 전 역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여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KTX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밖에 나가자며 생떼를 쓰기 시작하자 이 작은 생명을 데리고 여행을 시작했다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를 생각했다. 출발역인 행신역을 떠나 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몰려오는 잠을 참더니 기어코 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 기차 연결 칸을 수없이 오가며 짜증을 내는 아이를 으르고 을러 포항역에 도착했을 때 내 팔과 무릎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날 밤 고민 끝에 구웠던 빵이 진가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잠이 몰려오는 순간에도 아들은 빵을 달라고 했고 잘 먹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의 생떼가 폭발하지 않을까 세 시간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크지도 않은 빵을 잘게 떼어주며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우리를 반겨주는 아주버님과 형님 얼굴을 보니 그저 반가웠다. 아들은 포항역에서 식당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 차에서 잠이 들었고, 우리가 메밀국수를 먹는 내내 좌식 테이블 옆에서 깊은 잠을 잤다. 기분 좋은 잠을 자고 일어난 아들과 함께 포항 시내에서 가까운 월포해수욕장과 이가리 닻 전망대에 들렀다. 바다에 닿기도 전에 이미 하늘은 바다를 예견하듯 맑고 푸르렀다. 처음 바닷물에 발을 담근 아들은 그 넓고도 깊은 바다가 두렵지도 않은지 즐거워했고 주저앉아 물장구를 쳤다. 푸르고 싱그러운 오후였다. 비록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저 몇 시간을 달려왔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주말에 부모 손을 잡고 근교에 있는 해변을 찾은 많은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모래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주말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쇼핑몰에서, 키즈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낼 아들을 생각하며 각박한 시간 속에 말라갈 아들의 마음을 때 이르게 걱정해보기도 했다.      


사실 이번 여행을 단번에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긴 여행거리 때문에 첫 마음을 먹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서로의 일정 때문에 몇 번 미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여행을 떠나는데 주저함이 없는 가족들과 함께 자랐고, 나의 아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선은 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야 될 것 같았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작은 용기를 내어 가능한 이른 시간에 포항 여행 일정을 잡았고 짐도 최대한 가볍게 꾸렸다. 아들의 먹거리도 최대한 간단하게 구운 빵과 방울토마토 그리고 약간의 흰쌀밥만을 준비했다. 여행을 마칠 때 보니 흰쌀밥은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가 들렀던 식당에서는 갓 지은 밥과 아들이 먹을 만한 미역국, 생선구이 등이 소박하게 차려 나왔던 것이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보니 아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 시간 기차에 갇혀 생떼를 쓰며 울고도 여행지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체력과 어른들과 함께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었다.      


아들은 여행자로서 준비를 마쳤고 이제 나의 체력과 마음의 준비만 있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 더 용기를 내어본다. 포항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오늘 밤, 7월 초에 3박 4일간의 태안 여행을 급하게 계획하고 있다. 되도록 이동 거리는 짧게, 바닷가에서 보내는 시간은 길게, 밥은 어른과 아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아들의 여행 세포를 길러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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