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국교는 불교이다. 미얀마에 와보니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불탑 외에도 국가 대소사에 관여하는 불교 교단의 지위는 생각보다 크다. 무엇보다 60만 명에 달하는 승려들의 존재감은 그 수만큼이나 상당하다. 군부가 발간하는 관영지나 반군부 성향의 언론들을 보아도 승려들과 관련된 기사들이 종종 눈에 보인다. 나의 단조로운 일상에서도 승려들과 마주치는 일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승려들은 미얀마인들의 일상이다.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보면 불회를 마치고 온 승려들이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승려 전용 번호판인 노란 번호판을 달고 법복을 입고 운전하는 모습이 외부인의 눈에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60만 명의 승려가 아직은 조용하다. 2007년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샤프론혁명(Saffron Revolution) 때와는 달리 2021.2월 군부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저항하는 승려들의 집단적인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샤프론혁명 당시 미얀마 중부에 위치한 만달레이 지역에서만 만 명의 승려들이 모여 평화 행진을 했었고, 승려들의 연황색 승복 색깔을 상징적으로 일컫어 샤프론혁명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던 민주화투쟁을 경험했던 나라에서 그 많은 승려들이 침묵하고 있는가. 최근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에서 현재 정치적 상황에 승려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폭넓게 다룬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아래 내용은 국제위기그룹의 A Silent Sangha? Buddhist Monks in Post-coup Myanmar 보고서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종교는 또 하나의 권력이다. 왕권과 종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견제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미얀마 왕들에게도 불교란 필요악적인 존재였다. 특히, 미얀마에서는 전통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널리 보급하는 것이 지혜로운 왕의 덕목이었고, 1824년 영국의 미얀마 침공 당시, 미얀마 민돈왕도 외세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불교 경전을 재해석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려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국민들에게 불교를 보호하는 것이 비단 왕의 역할이 아닌, 본인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이어져 영국으로부터 불교를 지켜야 한다는 국민들의 의지가 미얀마 독립운동의 토대가 된다.
영국은 식민지배 시기 동안 불교 교단의 지원금 삭감 정책을 펴게 되는데 이는 불교 교단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또한, 국민들의 민생고로 인해 기부금도 줄어들게 되는데 이로 인해 승려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 이러한 불교 교단의 어려움에 같이 공감하던 국민들은 청년불교협회(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YMBA)) 등을 구성하여 외세로부터 불교를 구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당시에도 승려들의 정치참여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관계로 교단 자체가 독립운동에서 중심역할을 담당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독립 이후로도 크고 작은 정치적 현장에서 승려들은 목소리를 내었지만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승려들의 입장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앞서 언급한 샤프론 혁명 시기였다. 당시 군부의 유류비 보조금 철폐조치로 인해 촉발된 일반 시민들의 거리 행진에 군부들이 과잉진압을 하면서 그간 소극적이었던 교단 지도자들도 시민들과 함께 거리 행진에 참여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군부의 행태가 경전의 가르침과 대치되었고, 이로 인해 승려들은 평화적인 거리행진을 하면서 종교적인 보이콧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승려들의 대규모 정치 참여는 군부의 경각심을 높여 지금의 침묵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불교 교단은 왜 침묵하는가?
2021.2월 군부의 국가비상사태 직후, 국내외적으로 승려들의 대규모 반대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보도들이 많았다. 물론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반대시위는 끊이지 않고 있으며, SNS에서는 군부 반대 메시지들이 도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군부를 직접적으로 위협할만한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승려들은 왜 현재 정치적 상황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가?
가장 주요한 이유는 군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2007년 샤프론혁명 당시, 정치 운동에 참여하였던 승려들에 대한 대규모 탄압정책이 있었다. 2008년 종교문화부 산하 교단위원회(Sangha Council)는 승려들의 비종교적 목적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입장을 발표하였고, 군부는 이를 승려들에 대한 탄압 및 체포의 명분으로 삼았다. 선배 승려들의 경험을 생생히 경험한 승려들은 이후 정치 참여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2011년 문민정부로 이양한 이후, 불교 교단이 경험한 배신감 때문이다. 완전한 문민정부는 아니었으나 총선을 통해 당선된 떼인세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문민정부 5년, 그리고 아웅산 수찌 여사가 이끄는 민족주의민주동맹(NLD)의 압도적인 승리로 시작된 NLD 정부 5년은 일반시민들과 승려들의 희생으로 일구어 낸 정치적 승리였다. 하지만 일부 극우 민족주의 불교운동(MaBaTa)에 대한 NLD 정부의 배제 정책, 승려들의 정치참여에 반대하는 정부의 입장, 그리고 불교중심주의에서 다민족, 다종교를 포괄하는 NLD의 포용정책 등은 불교 교단으로 하여금 정치 참여에 대한 환멸감을 가져다주었다. 불교 교리를 지키고,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한다는 명분이 사실상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부-반군부 세력 간 무력을 바탕으로 한 상호 무력 투쟁 양상 때문이다. 군부는 말할 것도 없고, NLD 출신 의원들로 구성된 민주통합정부(National Union Government(NUG)의 지원을 받는 시민방위군(People's Defense Force(PDF)) 또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어 경전을 따라야 하는 승려들의 저항 활동 참여에 그만큼 제약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승려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무장 투쟁 등도 일부 진행 중이기는 하나 아직까지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네 번째 이유는 코로나로 인한 구심점의 해체 때문이다. 과거 승려들이 대부분 사원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주요 사원들을 중심으로 저항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사원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 많은 승려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승려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지역 주민들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구심점을 잃게 된 승려들이 회합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되면서 민감한 정치 사안에 대한 승려들의 목소리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과거 샤프론혁명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미얀마 중부 도시 Pokkaku에서도 2021.2월 국가비상사태 직후 영향력 있는 저항 활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와도 연관된 마지막 이유는 반군부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정치세력과 불교 교단과의 이질성 때문이다. 반군부 핵심 세력인 국민통합정부(NUG)와 시민방위군(PDF)은 일부 기독교 중심의 소수민족무장단체(EAO)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승려들은 향후 NUG를 중심으로 수립될 민주정부가 종교적 세속주의를 강화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기독교 중심의 EAO들도 불교 교단과의 협력을 원하지 않고 있는데 향후 연방 체제를 구성할 경우, 불교도 중심의 종교적 영향력을 최대한 견제하려는 움직임으로 파악된다. 승려들의 입장에서는 연합할 핵심 정치 세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형이 만들어져 버린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샤프론 혁명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시타구 사야도(Sitagu Sayadaw)와 같은 노승들은 군부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정당화하는 여러 불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에 불만을 갖는 젊은 승려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를 세력화할 만한 젊은 지도자들이 부재한 상황이다. 승려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군부의 단호한 입장이 지속되고, 앞서 언급한 이유들을 타개할 만한 젊은 승려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승려들의 침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