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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Mar 20. 2022

속도

집 근처에는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가파른 경사로가 있는 언덕배기에 있는 박물관이라 걸어서 가기는 쉽지 않지만 차로 6~7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 일주일에 한두 번 애용 중이다. 박물관에는 공룡뼈, 화석, 곤충들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 재미도 있으면서 배울 것도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아들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배경일 뿐이다. 아이가 흥미를 가지는 곳은 따로 있는데 박물관 3층에 있는 자연사도서관이다. 전면 전체가 유리창이라 밝고 따뜻한 데다 널찍한 마룻바닥이라 기어 다닐 곳도 많다. 높은 그물망 놀이터도 있어서 큰 아이들은 그물망을 오르내리며 즐겁게 논다. 덕분에 도서관이라고 해도 고요하다기보다 오히려 기분 좋은 시끌벅적함이 있다.      


보통 평일 오전 시간에 방문하는 터라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날따라 유난히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 돌을 갓 지난 아들 또래는 없었지만 유아들을 위한 도서관이라 많은 꼬마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막 걷기 시작한 아들은 계단 오르기를 좋아하여 낮은 계단을 하나씩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 옆을 꼬마들이 뛰어다니며 놀다가는 더러는 아들 때문에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계속 우리를 보고 있던 자원봉사자 한 분이 짜증 섞인 말투로 어린아이에게 위험하니 저쪽에 가서 놀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마루로 옮겨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서로의 안전을 위한다고 하니 달리 불만할 처지도 아니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오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놀던 자리는 며칠 전 다른 자원봉사자가 어린아이에게 놀기 좋은 아지트같은 곳이라며 알려준 곳이기도 하고, 꼬마들과 아들이 부딪힐 뻔한 것도 사실이지만 서로를 신기해하며 어떤 꼬마들은 아들의 손이나 머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아들을 기다려주기도 하면서 잘 지내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더 요령 있는 엄마였다면 그렇게 말하는 봉사자에게 내가 잘 볼 테니 조금만 놀게 해 달라며 소심한 반항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상하는데 어떻게 여태껏 큰 상처 없이 살아왔을까 하며 씁쓸한 마음이 드는데 생각해보니 난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부단히 애를 써왔던 것 같다. 학창 시절 반에서 제일 늦게까지 도시락을 먹는 학생이었다가 급식이 시작되면서 다른 친구들과 밥 먹는 속도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고, 말도 느려 아이들이 답답해했다. 마트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내고 물건을 주워 담는 속도가 느려서 계산하시는 분들이 내가 산 물건들을 밀쳐 놓고 다른 손님들의 물건을 바삐 계산하기 다반사였다. 나에게 맞는 속도로 그저 느리지만 꾸준히 가자고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늘 남들에게 뒤질세라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다. 그렇다고 그 느린 속도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거나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생기고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걷다 보니 삶의 속도에 대해서 조금 더 절실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뛰라는 압박을 받으면 죽을 만큼 힘들어도 뛸 수 있었고, 마트에서도 정신을 곤두세우면 정상 속도로 계산을 마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속도를 맞춰낼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고, 그 정상 속도라는 것도 사회의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 그 누구도 그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속도라는 이유로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괄시받고 위축되는 현실이 슬프다.      


얼마 전 전국장애인철폐연대에서 출근길 지하철을 막으며 시위를 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었다. 교통약자법이 통과되었지만 확실한 예산안이 확정되지 않아 장애인 이동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시위라고 했다. 출근시간 1~2분을 남겨두고 오지 않는 회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세상에서 가장 마음 바쁜 사람이 되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하철역 한 구간 운행시간이 2분이 넘어갈 때 그 절망적인 마음을. 그런데 시위로 오도 가도 못하는 아침 지하철에 탄 사람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리고 그 절망적인 마음은 곧 시위대로 향할 것이다. 날카롭고 잔인한 분노와 미움으로. 그 증오의 눈빛으로 가득한 지하철을 오르는 시위대의 마음은 또 어떨 것인지. 서로의 마음을 찌르고 찔리는 잔인한 침묵으로 가득 찬 지하철 안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물론 그 침묵의 무게로 받는 상처는 시위하는 사람들 쪽이 월등히 크겠지만 모두가 불쾌하고 서글프겠지.     


한 사회의 속도를 바꾼다는 것은 그 지하철 속의 날카로운 갈등과 반목을 수백 번 겪으며 이겨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인 듯하다. 그저 주어진 속도에 순응해 살다 보면 어떤 이들은 신속한 속도 덕분에 돈을 더 벌고, 어떤 이들은 목숨을 잃는다. 지금의 이 빠른 속도는 이 속도 덕에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정착시킨 속도일 텐데 오랫동안 순응하여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과 그 속도를 바꿔내고자 하는 또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를 헐뜯고 생채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 서글퍼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이 없다. 

     

만약 예산이 확보되어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면 지하철 정차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거나 지하철 내 이동수단이 확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나 속도가 느린 다른 교통약자들이 조금 더 편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폭이 넓어지면 누군가는 불편을 겪게 될 것이고 예산도 늘어나겠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항상 희생당하고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그 야만적인 문화로 언젠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의 가족들이 희생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 있는 불편함을 개선의 징후로 받아들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속도를 함께 찾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아기가 여기를 좋아하니 조금 더 놀게 해 달라며, 다른 꼬마들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놀겠다고 한 번쯤은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자원봉사자의 마음에 불편함 한 가닥 정도는 심어줄 수 있었을 텐데. 오늘도 결국 그 불편한 순간을 이겨내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에게 다음번에는 조금 더 용기 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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