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커피일기

[일상] 천고마비의 계절

by 아무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이하여 책을 읽읍시다’

이맘때가 되면 20년 전쯤 초등학교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독서 부장이었나 미화 부장이었나, 둘 중 하나였던 나는 그 당시 신나게 외웠던 사자성어, ‘천고마비’를 뽐내고 싶었나 보다. 학급 회의 때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이 계절에 책을 읽자는 발언을 했고 부반장이 칠판에 적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20년이 지난 지금, 문득 그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가을은 책 읽기 힘든 계절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을 막 벗어나 푸르고 높은 하늘을 맞이하면 결코 책에 집중할 수가 없다. 햇살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가만히 앉아 하늘만 바라봐도 행복한 요즘은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아니다. 책은 무더운 날 커피숍에서 아아를 마시며, 추운 겨울날 아랫목에 앉아 귤 까먹으며 보는 것이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말, ‘천고마비의 계절 책을 읽읍시다’는 어리고 푸르던 내가 새로 외운 사자성어를 친구들에게 삐대기 위해 했던 말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그 문장, 가을이 오면 문득 떠오르는 어이없는 나의 추억이다. 요즘의 내가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어느새 중년이 된 나는 아직도 마음은 예전 같은데 몸의 기운이 따라주질 않는다. 아직 30대 같은데 늙어버렸다는 말은 어머니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덧없고 세월이 무상함을 느낀다. 모든 것이 허망하게 떠나가는 가을이기 전에 모든 것이 여물어 수확하는 계절도 가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외롭고 쓸쓸하게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진 후에 비워지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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