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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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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15. 2021

오늘의 커피

도자기로 만들어진 드리퍼를 샀다. 플라스틱 드리퍼가 초보자, 입문용이라면 도자기 드리퍼는 중급쯤 되는 모양이다. 구멍 크기는 비슷한데 물 내려가는 속도가 느려 플라스틱보다 2배쯤 시간이 더 필요하고, 도자기 특성상 따듯함이 오래 유지된다. 덕분에 커피 빵도 쉽게 가라앉지 않아 신선하지 않은 원두를 사용해도 커피 빵이 만들어진다. 물을 따르는 대로 바로 흘러나오지 않으니 커피의 맛도 조금 깊어졌다.

요즘 마시는 커피는 유통기한이 6개월이나 남은 빽다방 원두이다. 예전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저가형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사용하는 원두. 신선하고 비싼 원두가 훨씬 맛이 좋겠지만, 대중적인 원두도 어떤 컨디션으로 준비하느냐에 따라 풍미를 살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원두의 상태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지지만, 또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새해를 맞이하여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려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한때는 마음을 주고받은 소중한 인연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불편한 사건이나 소원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요, 싸운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멀어진 사람들을 아쉽지만 놓아주려 한다. 소중한 추억의 실체는 그 시절 내 마음일 뿐이다. 그들과의 관계 맺은 시간에 집착하는 내 마음의 깊이일 뿐,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상황, 환경의 영향으로 이제는 멀어진 사이, 이미 지나와 버린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한때는 내 것이 아닐 줄 알았던 도자기 드리퍼가 내게 왔고, 플라스틱 드리퍼는 찻장 속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지 일주일째다. 도자기의 깊은 맛을 알아버렸으니, 다시 플라스틱을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상태가 아쉽지 않으니 우리들의 관계를 돌이키기 쉽지 않다. 굳이 관계를 이어가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함께 나눈 편지와 선물을 보면서 열정이 가득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린다. 그래도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 나눠야겠다. 서먹하게 흘려보내진 말아야지. 그게 내가 보낸 시간을 인정하는 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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