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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Mar 28. 2022

시골살이 첫 장독 김치

앵두꽃은 팡팡  

   



   강한 바람과 푸근한 햇발이 동시에 들이친 날. 뭉게구름 떼 지어 노니는 하늘이 드맑다. 서남서풍 4m/s, 한낮 최고기온 20도.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앵두꽃이 팡팡 터진다. 참새와 제비와 멧새와 직박구리와 까치가 전깃줄로 당산나무로 몰려다닌다. 그 님들이 화들짝 오시었다. 눈물과 재채기 님, 콧물과 코막힘 님. 어느 심술쟁이 꽃가루가 0.0001초 만에 내 소중한 콧속을 점령한 건가. 꽃향기 공중이 괴로워졌다. 말간 콧물을 받아내는 티슈가 앵두꽃 피듯 뽑혀 나온다. 콧속이 말라 풀방구리에 들쥐 드나들 듯 정수기 앞으로 달려간다.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이뿐이면 좋으련만.


 마당 동산에서 가장 먼저 향기 뿜뿜했던 매화나무.  한 송이가 남았다.



   그간 무심했던  뒤뜰의 장독이 난제. 생각으로만 어서 꺼내야지, 꺼내야지 하며 미뤄뒀다. 건물에 가려 일 년 내내 해는 못 받지만 따신 공기는 안 받을 턱이 있는가.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혹시나? 마스크로 코를 단단히 막았다. 겨우내 비닐로 덮어둔 장독을 연다. 지난해 12월 5일의 김장날 이후 첫 공기를 쐬는 세 장독. 두 독은 김장 때의 양념김치, 한 독은 소금물에만 담근 배추. 동치미 장독은 세 번을 열었다. 마지막엔 먹을 수가 없었다. 어쩜 그토록 짜게 돌변할 수 있는가. 에잇, 내버려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앵두꽃이 팡팡팡 피고 있다.

   두근반세근반, 양념김치를 덮은 배추 시래기를 걷어냈다. 얌전히 익어 있다. 김치냉장고의 김치와는 다른 오묘한 냄새. 깊은 산골의 눈 쌓인 삼월 장독을 열면 이런 내음이 나지 않을까. 물배추 위쪽에 하얀 꽃이 피었다. 이를 어째. 버려야 하나. 안쪽은 어떤가 싶어 몇 포기를 들어냈다. 뽀얀 속살로 누운 배춧잎들. 담금물에도 꽃가루가 번졌다. 마당가의 수도를 틀어 빠득빠득 헹궈냈다. 김치냉장고 정리까지 해야 하는 판국이다. 넣어둔 기억도 없는 물컹한 녀석들이 얼굴을 내민다. 버리고 포개고 엎치락뒤치락하여 네 통을 비웠다. 양념김치를 옮기니 8할이 무김치. 지난겨울 텃밭에선 무가 잘 자랐다. 다 담그지 않고 텃밭에 묻어두고 꺼내 먹는다.



장수매가 정원의 가장자리를 온통 물들이고 있다.

   물배추는 지인의 권유로 담갔다. 봄에 꺼내 양념해서 먹으면 새롭다 하여 시도했다. 물기를 뻬고, 얼려둔 양념을 녹였다. 과연 어떤 새로운 맛이? 새끼손가락만 한 속잎을 떼어먹었다. 참으로 참으로 기가 막히게 짰다. 태어난 이후로 처음 맛본 짠맛이었다. 소금 한 줌을 털어 넣으면 이런 맛이 날까. 대체 얼마나 소금을 퍼부었기에. 몸에 좋은 거라며 남동생이 준 비타민c 분말이 훅 떠올랐다. 30년 전 일이다. 엥? 몸에 좋은 거라꼬? 한 숟갈을 퍼서 입에 넣었다. 한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뇌가 마비되는 듯했다. 그 신묘 오묘한 신맛 같은 짠맛이라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어찌하면 좋은가. 소중한 양념김치를 버릴 수는 없다. 팔순 넘은 친정어머니가 허리 밴드를 꽉 조이고서 조물조물한 김치양념. 막내딸의 테니스 엘보 증상이 행여 더 나빠질까, 배추도 뽑기 전에 서둘러 보내셨으니. 인터넷을 뒤졌다. 생무를 잘라 넣는 방법이 있다. 텃밭 흙 속에 무가 아직 남았다. 일단은 버무려서 짠맛을 줄여봐야겠다. 하얀 꽃도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꽃가지(골마지)라 걷어내거나 씻어서 먹으면 괜찮단다. 곰팡이라는 생각에 먹지는 못하겠다. 무김치도 몇 개가 변색했다. 윗부분을 비닐로 봉하고 물에 잠기도록 손봐야 하는 걸 몰랐다. 하얀 꽃 배추도 변색한 무도 음식물쓰레기가 돼버렸다. 텃밭 가장자리에 내다 널었다. 오늘의 해와 바람이 잘 말려주리니. 동치미와 물배추에 넣는 소금 양이 연구과제다. 승패 병가지상사라 하니 승패 장독김치지상사인 거지 뭐. 아는 길도 물어 가라 하거늘 언제나 대충이 문제다. 올 겨울엔 좀 더 잘할 수 있겠지?



밤비 내린 후 미세먼지도 싸악~

   크고 작은 장독들이 2년 전에 우리 집 벽돌담 곁으로 들어왔다. 순전히 정원 장식용도였다. 시외할머님과 시어머님의 짭짤한 손맛이 대를 물려 들락거렸다. 이젠 시어머님에게도 장독은 옛 이야깃거리로나 남았다. 봄엔 양지와 패랭이와 꽃샘바람이, 여름엔 개망초와 접시꽃과 돌풍 장대비가, 가을엔 개미떼와 미국쑥부쟁이와 소경불알꽃이, 겨울엔 솔잎과 눈꽃과 새똥이 장독 뚜껑에서 꽃놀이를 했다. 어머님들의 장독 음식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전래동화 같다. 장독 음식은 전통 비법 손맛이 필수이니 얼씬거릴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음식이 흥미로웠다면 양가의 장독 기술을 전수했을까. 김치는 김치냉장고가 맛나게 익혀주니까. 된장, 간장, 고추장 그 어떤 장독 음식도 사 먹을 수 있으니까. 기업형 맛인들 어쩌랴. 내가 못하면 입맛을 맞추는 거니까. 다행히도 아직은 최고로 맛난 엄마표를 먹는다. 언제쯤 나는 어른이 되나.



   시어머님의 배추로 밤잠 설쳐가며 치른, 시누이와 올케 들의 1박 2일 김장행사도 막을 내렸다. 남편이 정성껏 가꾼 배추와 무를 어찌하겠는가. 서투르나마 세 남자 식구의 힘을 빌려 담글 수밖에는. 장독 김치는 이번 김장날에 식구들 마음이 하나 되어 이룬 일이었다. 땅에 장독을 묻으면 더 맛나다 하여 텃밭을 도모했으나 꽝꽝 언 땅은 삽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해가 들지 않는 뒤뜰이 있어서 다행. 매번 배추 사는 일이 걱정인 어머니도 사위가 기른 배추와 무로 두 해째 김치를 담갔다. 지난겨울엔 차 트렁크에 빽빽하게 싣고 직접 갔다. 오랜만에 자식들 목소리를 마주한 어머니 야윈 볼에 맑은 우물물이 찰랑거렸다. 기른 값을 두둑이 내어주셨다. 거실엔 고소한 쇠고기 냄새가 진동하고.

한 번 해봤으니 올 겨울엔 더 잘할 수 있겠지?



   창 꼭꼭 닫아걸고 뒤척인 밤 내내 비가 내렸나 보다. 촉촉한 아침 마당에 눈을 대니 푸른 잔디 기운이 속속 솟구친다. 꽃향기를 못 맡아 못내 아쉽지만 눈으로 만질 수 있으니 비할 바 없는 기쁨이다. 동네를 빙 둘러싼 영남알프스의 먼 능선들, 가까운 나무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자연이 <내 이름은 빨강> 소설에서 만난 세밀화 같다. 새싹이 부드러운 땅을 두드리며 오른다. 가지는 새순과 꽃송이로 충만하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는 섭리를 보고 만지고 맡고 듣는 나의 눈도 충만하다. 마당 동산의 매화나무가 마지막 꽃 하나를 남겨두었다. 홍매나무에도 변색한 꽃 하나 달랑 남았다. 곧 잎사귀와 열매 보따리를 한그슥 풀어놓겠지. 피는 꽃은 밝은 색으로 지는 꽃은 어두운 색으로 오늘의 드센 바람을 흔든다. 환한 수선화 여섯 송이 옆에서 어두워진 세 송이가 다음 행선지로 가는 봇짐을 싼다.

  

수선화 세 송이가 다음 여정으로 떠날 채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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