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괴로움에 대하여
Pixabay로부터 입수된 Herbert Bieser님의 이미지 입니다.
작업실이 생겼다. 오전 8시 45분 첫 출근을 했다. 친한 언니 공방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 빌려 쓰기로 했다. 아침에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밤사이 가두어진 공기들 순환을 위해 창문을 열었다.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 하는 클래식 방송을 틀어놓고,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느꼈다. 연결을 원하는 지인들 두 분과 통화했다.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본격적으로 포스터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끝내야 한다. 마지노선이다. 성격상 뭔가 일을 할 때 조기착수를 하지만 마감이 깔끔하지는 않은 편이다. 마감일은 지키지만 내용이 소름 끼칠 만큼 훌륭하지 않다. 물론 내 평가이다. 기준이 높은 탓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부분들이 완벽주의와 관련 있다. 현재는 조절하려고 하지만 중간 그 어딘가가 어딘지 모르겠다.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마음먹으니까 한동안은 완성도가 많이 떨어졌다. 슈퍼바이저 선생님께 내용을 지적받기도 했다. 이제는 완벽과 만족 그 어디 즈음 나에게 맞는 걸 찾고 있다.
포스터작업을 해야 하는데 딴짓을 하다가 sbs앱 고릴라에 접속했다. 오전 9시 40분은 김창완의 아침창 라디오에서 책을 읽어주는 걸 듣곤 한다. 오늘 나온 내용이다.
김연수 산문집, 소설가의 일 중
이건 1932년 자신의 첫 소설인 '북회귀선'을 쓰면서 헨리 밀러가 창안한 11 계명이다.
1. 한 번에 하나씩 일해서 끝까지 쓰라.
2.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두 번째 소설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마라.
3. 안달복달하지 마라.
지금 손에 잡은 게 무엇이든 침착하게, 기쁘게, 저돌적으로 일하라.
4.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계획에 따라서 작업하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만 써라!
5. 새로 뭘 만들지 못할 때도 일은 할 수 있다.
6.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7. 늘 인간답게!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곳에 다니고, 내킨다면 술도 마셔라.
8. 짐수레의 말이 되지 말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운만이 느껴져야 한다.
9. 그러고 싶다면 계획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계획으로 돌아와야 한다. 몰입하라. 점점 좁혀라. 거부하라.
10. 쓰고 싶은 책들을 잊어라. 지금 쓰고 있는 책만 생각하라.
11.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다음에.
밀리의 서재에서 책 내용을 찾아보고 옮겨졌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급하게 메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시간에 일하라.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할 수는 있다.
몰입하라. 점점 좁혀라. 잊어라.
지금 하고 있는 일만 생각하라.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지금은 하고 있는 그것을 끝내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었을까.
DJ인 김창완 아저씨는 "짐수레의 말이 되지 마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움만 느껴져야 한다."이 말이 와닿는다고 했다.
마침 오늘부터 작업실이 생긴 나에게 딱 맞춤형 내용들이 아닌가.
내가 라디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삶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준다. 어떤 때는 딱 맞는 타이밍에. 나는 누군가 가이드해주는 게 필요한 사람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불안도 높다. 그 부분에 에너지를 많이 쓰느라 실제 집중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모를 때는 헤매지만, 이제는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방법을 찾아 할 시기다.
이미 논문 쓸 때 경험했다. 매일 같은 시간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어쨌든 완성은 된다. 심학원 공부도 더하고 싶고, 다시 논문도 쓰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포스터를 끝내야 한다.
석사논문 내용을 정리해서 한 장짜리(90 cmx150 cm)로 만드는 것이다. 논문을 보내면 정리해서 포스터 인쇄까지 해주는 업체도 있다고 한다. 비용을 지불하면 이 힘든 작업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가 해보고 싶었다. 괴로움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왜 선택했는지 안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학회 포스터발표에 대해 물어봤을 때, 상세히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내 논문이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표를 찍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지금 내 상황은 이걸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다. 박사과정 중에 있거나, 학회 수련을 준비할 때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그러면 이런 고민 없이 '한다'는데 집중할 수도 있겠다. 현재 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 괴로움을 선택한 터라, 그 괴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나 보다.
또 한 가지는 현재 생활에 여유가 좀 있다. 3월에서 6월 사이 상황보다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다. 지인들은 지금 상황도 충분히 바쁜 거라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니 말이다. 장점은 내가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걸 온전히 느끼고 경험하고 있고, 단점은 그걸 느끼기 시작하니 괴롭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러한 모든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바쁘게 살았었구나 싶기도 하다.
글을 적다 보니, 지금 내 상황이 보인다.
나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석사 논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부끄러움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러니까 다시 포스터작업을 시작하자.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작업실에 왔을 때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구조화하는 것이다.
오늘 글쓰기는 여기까지.
앞으로 하루 30분은 글쓰기를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