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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Jul 13. 2023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대충 하려는 심리

사진출처 : @munkyo.seo (인스타그램)


나는 꼼꼼하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상담센터에서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한테 이 말을 하면 "뭐라고요?"라는 반응이다. "선생님처럼 꼼꼼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가 다르다.


이 틈새는 무엇인가.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특정 영역은 꼼꼼하지 않다.

 화요일 상담 한 건이 종료되었다. 기본 10회기 상담에 10회기가 다 되어서 내담자와 합의하에 종료했다. 보고서를 쓰려고 보니, 엥? 10회기가 되지 않는 게 아닌가? 온라인 시스템에 들어가서 회차 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시스템의 오류였다. 왼쪽 끝에 0,2,3,4.... 이렇게 번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1'이 빠진 것이다. 나는 끝에 번호만 보고 10회기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오류가 더 있었다. 이건 나의 실수였다. 상담이 끝나면 바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학교 시스템에 등록한다. 내가 1,2,4,5,6... 이렇게 회기보고서를 작성한 게 아닌가. 아... 이번에는 '3'이 빠졌다. 내가 숫자에 약한 편이다. 숫자를 보면 하나씩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숫자와 관련된 영역은 덩어리로 보이고 세세하게 확인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논문 쓸 때도 그랬다. 통계작업을 할 때는 내 온몸에 세포하나하나를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막막하고, 해도 해도 안되고 힘들었다. 난 바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런 실수가 나온 게 아닌가. 이 기관에서 10회기까지 상담은 처음이다. 등록시스템을 사용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호를 하나씩 확인했어야 했는데. 아. 어제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걸 어떻게 보고하지?' '이미 완료보고서도 제출했는데?' '그럼 슈퍼비전 보고서는 어떻게 하지?' 지금 떠올려보니까 문제해결을 위한 생각들이었다. 


 그다음 심리적으로 가까운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그러셨다. "에이, 그럴 수 있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아마도 내가 나에게 위로해야 할 말들을 스스로에게 하지 못해서 도움을 청했나 보다. 일단 슈퍼비전 보고서를 내야 하니, 다른 사례로 밤 10시까지 작성 완료했다. 덕분에 진짜 도움받고 싶은 사례로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 전화위복인가. 이제는 보고만 남았다. 톡이나 메일로 드리면 뭔가 더 복잡해질 거 같아서 다음 주 출근해서 보고해야지 싶다. 그러니 나는 꼼꼼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어떤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꼼꼼하다. 나는 사람을 잘 챙긴다. 온라인에서는 잘 못하고, 대면상황에서 강하다. 그래서 온라인까지는 챙김의 에너지를 쓰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다. 화요일 함께 근무하는 분들 근무상황부 작성, 아침 사례회의 보고, 상담센터 관리(창문, 프린터기, 분리수거 등 사소한 것들 포함)는 잘한다. 어떤 분들은 잊고 쓰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내가 챙겨서 쓰게 된다고 한다. 고맙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함께 하는 이들과 무언가는 잘 챙긴다. 하다못해 11시 상담인데 12시 넘어 마치는 분 점심참여 여부까지 챙기는 편이다. 그러니 함께 근무하는 분들이 각자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이 온다. 나에게는 '연대감'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이다. 그래서 함께 하는 분들과 무엇 가는 나에게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나의 일에 소홀한 편인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논문도 그랬다. 당시 회사보고서를 더 열심히 썼다. 내 논문이 뒷전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또 그때가 떠오른다. 학회 포스터 작업을 수정 중이다. 석사 때 교수님의 피드백 중 절반은 숫자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하. 나는 장단점이 너무나도 뚜렷한 사람이다. 


다행히 내가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무력감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이 참 나에게는 힘든 영역이구나 알아차리고 있다. 분명 마음먹고 앉아서 일어나지 않고 작업을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미루는 '내'가 보인다. 어떤 영역에 유능감을 느끼려면 그만큼 시간도 많이 투자하고 실패와 좌절감도 맛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열매만 따먹으려고 했었다. 그러니 힘들었지. 이제는 힘든 과정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부딪히면 멍해진다.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내가 보인다. 어제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더랬다. 


오늘 아침 교수님의 메일을 프린트해서 다시 한 글자씩 읽어보았다. 이 부분은 이렇게 수정하면 될 거고, 이건 다시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마음도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포스터를 만들면서 다 고민했던 부분이다. 교수님은 정당한 부분에 적절하게 지적해 주셨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셨음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오탈자도 있음) 교수님도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내 결과물을 돌봐주신 거다. 정신 차리고 보니 보인다. 그런데 왜 어제 그제는 마음이 그리 힘들었을까.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좋은 결과만 바랐기 때문이다.


나무도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강한 햇빛, 비바람 치는 태풍, 기나긴 장마를 거쳐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나는 꽃 보고 바로 열매를 따려 했다.


그랬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제는 말이다.


오후 2시에 여름방학 집중 학습상담 오리엔테이션 갔다 와서, 포스터수정작업에 세포 하나하나 에너지까지 끌어와서 해보자.


그래, 봄 다음에 여름, 그리고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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