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비친 내 모습과 내 안의 내 모습
남들에게 이해받으려 했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사례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수퍼바이저 선생님들께서 한 사례에 대해서 20~30분 정도 이야기를 하신다. 처음 참석했을 때는 내 몸의 변화를 잘 감지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행사 운영하느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했다. 온전히 참여만 할 때는 내용이 잘 들린다. 책임감을 내려두고, 공부하는 나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특히 사례에서 만날 때는 더 깊게 다가온다. 어제도 그랬다.
그 순간 나는 상담자도 아니고, 내담자도 아니었다. 제 3자 입장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록에 대해 듣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으면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 잘 들려서 그런걸까. 한 문장에 꽂혔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니, 밖에서 찾으려고 했겠지요."
그랬다. 책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나 스스로 찾지 못했던 내 모습을 찾아 헤메었다. 그러면 더 선명해지리라 생각했었다. 머리로 아는 걸 가슴으로 깨닫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어제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나보다. 진짜 내가 여기 있는데, 밖에서 찾으려 했다. 그랬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지난 주 집단상담 수업에 참여하며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분명 기분이 나쁜 부분이 있었는데, 사회 속에 '나'가 더 중요했기에 그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집에서 보고서를 쓰면서 깨닫았다. '내가 그때 기분이 나빴었구나.'
타고난 기질도 있고, 살아온 환경도 영향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내 감정을 느끼는 걸 무의식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어제 만난 두 사례 모두 나에게 그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때 같은 수업을 들었던 동기에게 그때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집단상담 장면에서 다루면 어떠냐고 물었다. 수업이긴 하지만 상담실제 현장이기도 하다.
그간 나는 내 안에 나를 굳건히 믿지 못하면서, 내 의견대로 하려했었다. 누군가와 의논하는 것에 부담이 있었다. 그 사람이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줄 것이냐에 집중했기에, 진짜 중요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안에 나를 작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더 부풀리려 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성취해내는 모습으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 속에 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만나지 않으려 했다. 뭔가 해내고, 열심히 하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엄마일연구소, 글쓰기, 집단상담 등 여러가지 작업들이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게 해주었지만 핵심, 진짜 '나'는 거부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러한 작업들이 긍정적인 자원이 되었다. 10대, 20대 '나'보다는 현재 '나'가 훨씬 좋긴하다. 앞으로는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들을 통과하는 '나'가 만들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나와 나의 관계
상대와 관계 속에 비친 내 모습에서 긍정적인 나를 찾으려했다.
내가 나를 만나면 초라하고, 비참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건 내 모습을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런 나도 괜찮다.
괜찮다.
그럼.
명상앱인 마음보기를 2년 가까이 이용 중이다. 도움을 받고 있다.
금요일 트라우마 관련 실습 수업도 도움되었다. 어제 수퍼바이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문장이 기억난다.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며 맺게 되는 관계이다.
내일은 3주 만에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그 전에 이렇게 정리해 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