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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Oct 31. 2020

애쓰다

직업에 대하여

깨닫은 순간

저녁 수업이었다. 아이들 이른 저녁을 차려놓고 집을 나섰다. 오후 7시 시작이라 퇴근시간 고려해서 조금 일찍 나섰다. 가다가 해가 저물었다. 어렴풋이 밝던 바깥 풍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학교 도착 15분 남짓 앞두고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야?

 가을바람 불기 시작할 때, 멘토 선생님들을 만났다. 상담 전공하기 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구조화 집단상담에 참여한 적 있다. 그때 선생님을 만났다. 매주 2시간씩 만났기에 계절이 바뀌는 만큼 동안 만났다. 선생님은 추수 상담도 진행하셨다. 그때 선생님께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원래는 안되지만 메일 주소를 알려준다고 하셨다. 지금 보니 상담자 윤리에 나와있는 부분이었다. 그 이후로 계절마다 한 번 정도, 또는 더 자주 센터로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인연이 5년째 이어지고 있다. 가끔 메일 드리거나, 만날 때 선생님이 한 마디씩 툭 해주시는 부분이 내 인생에 영양분이 되고 있다.

 이번에 만났을 때 그러셨다. 

"왜 그렇게 열심히야?"

선생님은 꼭 내 이름 옆에 ~씨를 붙여주신다. 그다음 말들은 애정 어린 충고들이 이어진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은 아니다. 질문을 해서 내가 생각하게 해 주신다.

'그래, 뭐 때문에 이토록 열심히 하지?' 고민하다가 이번에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는 정말 애쓰면서 살지 말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100점 만점을 위해 애쓰고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80점을 기준으로 살아봐야겠다고.

그 이야기했더니 선생님이 그러신다.

"공부를 놓으면 안 되지!"

공부를 놓으려 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장학금을 받으려고 아등바등 살지 않으려고 했던 모습이 오히려 너무 느슨해져 버렸다.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여기서도 있었다.

 상담 선생님도 그러셨다. 첫 상담 날이었다. 

"이 길로 들어서신 걸 환영합니다. 정말 잘 오셨어요."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아직도 울린다. 세상에 모든 일이 선명한 건 아니라고, 모호함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정말 그랬다

 결정에 대한 부분들이 그랬다. 모호함이 힘들어서 빨리 결정해버렸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오늘 말하려고 하는 건 직업과 관련된 부분이다. 첫 직장은 정년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애를 써서 기사 자격증을 따고, 필기시험을 치고, 면접도 운 좋게 잘 보았다. 그래서 입사했다. 대학교 3학년부터 꿈에 그리던 직장이었다. 그런데 4년 만에 퇴사했다. 중간에 갑자기 결정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육아휴직 후 복직한 뒤, 시댁과 함께 살면서 친정에 아이를 맡겼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사 등 여러 가지 일들이 휘몰아쳤다. 그때 나는 다른 꿈이 생겼다고 착각했다. 퇴직금으로 사서교육원을 다녔다. 1년 뒤 준사서 자격증이 생겼고, 직업은 무직이 되었다.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산업강사, 웨딩플래너, 미스터리 쇼퍼, 리뷰어 등등이다. 학교를 가는 길에 선생님들의 질문들이 머릿속에 생각나면서 지난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남편과 대화에서 한 문장이 마지막 한 방을 날렸었다.

"솔직해져. 너 그 회사 나온 거 후회하고 있잖아."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애쓰며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증명하고 싶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나오면서 더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겉으로는 잘 사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뭘 해도 내가 모라자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고 있지 못했었는데,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까지 그렇게 되니까 더 애쓰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쌍해 보이기 싫었다. 그 감정을 느낄까 봐 발버둥 치고 싶었다. 어쩌면 대학원 진학도 첫 직장 퇴직 후 못나 보이는 나를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석사에서 박사까지 하면, 적어도 못난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이었다.


'그래서 증명하면 나에게 뭐가 좋은 건데?'


나에게 물었다. 없었다. 그냥 남들에게 잘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갑자기 나의 진짜 속마음을 마주하게 되니 눈물이 흘렀다. 휴일에 아이들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어린이실에 책 읽어라고 하고 열람실 가서 10분 단위로 쪼개 가면서 자격증 공부했던 모습, 정말 마음이 바쁜데, 집안일도 잘하고 싶어서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고 했던 모습,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에 자다가 몇 번씩 깼던 모습 등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그 모습들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20대 대학생 때나, 30대 방송대 편입 후에도 애를 써서 장학금을 타려 했던 건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왜냐면, 나 스스로는 나를 온전하게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운전하면서 이 모든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앞이 안보일만큼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다행히 학교에는 잘 도착했다.


온전히 나로 하는 일


 

    앞으로 내가 직업을 갖게 된다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하고 싶다.


경력을 거꾸로 하면 역경이 된다고 한다.

이번에 선택하는 일은 역경이 쌓여서 경력이 되게끔

모호한 시간들을 견뎌서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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