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마지막 이시죠?“

인연의 온기

by 스타티스

2025.1.24 금


고작 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친해질 수는 있지만, 인연을 유지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내 삶에 누군가를 쉽게 들이는 편은 아니다. 대신 이미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더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편이다. 나는 사회적 관계와 삶의 인연을 구분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올 때부터 사람 관계에 큰 기대는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한 달을 함께 지내본들, 한국에 돌아가도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있는 인연을 유지하기도 벅찬데 새로운 관계를 더하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가족 연수로 온 엄마들이 함께 쇼핑을 가거나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자리에 빠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어떤 가정에 어떤 아이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그들은 나에게 철저히 남일 수밖에 없었다. 어학원 운영 특성상 가족 캠프에 참가한 사람들은 호텔(숙소)에서 어학원까지 매일 차량으로 이동한다. 8세부터 18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한 차량에 타는데, 특히 9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은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그런 아이들의 소음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량에 타고 내릴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특히 나는 큰 소음을 견디는 것이 어렵기에 등하교 시간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겼다. 3주가 지나자 어느 가정의 어떤 아이인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성격과 행동 패턴이 파악되니 왜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와 5학년 남자아이는 자주 다투는 편인데, 초등학교 2학년 아이는 1학년 아이와도 자주 부딪힌다. 이 아이는 자신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신기하게도 우리 가족(고2, 초5, 나) 앞에서는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어른스러운 말투를 사용한다. 이 아이를 중심으로 다른 아이들과 얽힌 관계를 파악해 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부모님들께 묻지는 않았지만, 내 눈앞에서 보이는 행동과 말만으로도 아이들의 성향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아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 이유를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가 특정 행동을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전후 맥락과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필리핀 생활도 이제 한 주만 남았다. 여기서 깊은 인연을 쌓지는 못했지만,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한 아이들은 종종 떠오를 것 같다. 오늘은 처음 계약했을 때 우리를 많이 챙겨주었던 이사님과 마지막 날이었다. 그분은 한국에서 겨울방학 어학연수 캠프를 모집해 우리보다 한 주 먼저 도착했고, 3주를 함께 보냈다. 특히 우리 아이들을 많이 챙겨주셨다. 아마도 내가 우리 지역에서 이 유학원을 통해 혼자 왔기 때문에 더 신경 써주셨던 것 같다.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시고, 특히 우리 둘째를 잘 챙겨주셨다.


꼭 깊은 인연만 소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솜털처럼 가볍고 짧은 인연이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데는 충분하다. 그 순간만이라도 말이다. 어쩌면 나는 헤어짐이 힘들어서 더 많은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헤어짐도 가볍게 넘길 줄 알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인연들 덕분에 내 삶은 조금 더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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