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어디 즈음
거실에서 하늘이 보인다. 2년 다른 아파트에 이사 갔다가 여기로 다시 온 이유다. 앞동이 없다. 고층이라 하늘이 보인다. 숨통이 트였다. 아이들도 눈만 떠도 좋다고 한다. 그래서 15층 이상 고층을 고집한다. 지난 2년 5층에서 살았었는데, 앞 동 뒷 동 사람들과 집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 아파트는 조경이 참 예뻐서 걷기에도 좋았는데, 결정적으로 집 안에서 타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으려 했다. 그런데 전기밥솥에 딱 2인분의 밥만 있는 게 아닌가? 두
따님 점심 먼저 챙겨주고 백미쾌속으로 빨리 밥을 지어서 따로 먹었다. 가방에 노트북과 '애착외상의 발달과 치료' 이번달 가계부 쓸 것 등을 챙겨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디야로 갔다.
이사 오기 전에는 당연히(?) 차로 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걸어갔다. 5분 남짓 걸리는 곳이다. 걸어가면서 하늘을 보게 된다. 어제 아침, 상담센터 출근하면서 무거운 전화를 받았다. 심리적 폭탄이었다. 예전에는 온전히 내 몸으로 받았겠지만, 이제는 그 폭탄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폭탄이구나'알아차라기만 했다. 그리고 내 역할과 의무를 다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땅을 보았다.
앞으로 뭘 할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걸으면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그렇게 짧은 거리를 긴 생각들을 오가며 걸어갔다. 가계부는 생각보다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숫자에 진짜 약한 편이다. 얼마 전에 버크만 진단검사를 했는데, 숫자 영역이 거의 바닥이 아닌가? 해석상담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이 정도 결과면 평소에 장 보러 갔다가 물건 샀는데도 얼마인지 기억 못 하시겠는데요?" 그랬다. 나는 그렇게 숫자가 기억나지 않았다. 가족들 전화번호도 아직 못 외운다. 남편은 지 편한 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는 잘 안되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서 속상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써야 할 시점이 왔다. 전반적인 지출을 적고, 매달 나가는 큰 분야를 나누었으며, 전체적인 금액을 산정했다. 애를 써서 하려고 하니, 예전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거 같다.
어쩌면 그전에는 이만큼 애를 쓰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온전히 내가 다 해야 하기에, 그래야 하기에 정신을 차렸다.
이디야 2층에서도 하늘이 보인다.
가계부 정리를 끝내고 하늘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또 해야만 하는 일을 꺼냈다. '애착외상의 발달과 치료'를 읽고 리포트를 써야 한다. 심학원 과제다.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또 바닥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집단상담 강의 시연수업 참관, 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강의 관련 수업을 듣고 나니, 이 시간이다.
하늘과 땅 사이 그 어디 즈음에서 매일을 헤매고 있다.
뭐라도 되겠지.
오늘도 그 생각을 하면서, 일단 쓰긴 쓴다.
뭐라도 써야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