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의 냄새

by 릴리슈슈


집에 돌아왔는데 익숙한 향이 났다.
"엄마 빨래 했네?"
"어, 대만에서 쓰던게 너무 좋아서 그걸로 했어"
"응, 나도 그거 좋아"

김여사가 일주일 체류를 두달 체류로 변경한 날, 우리는 함께 시먼딩의 까르푸에 갔다.
살아남기 위한 아이템을 구비하기 위해서였다. 숟가락과 젓가락부터 냄비와 베갯잇까지 사야할 것들이 많았다. 그 목록 중 하나가 세탁용 세제였다. 세제 코너까지는 갔는데, 뭐가 세제인지 섬유유연제인지 표백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숟가락도 중국어로 몰랐던 때니 세제까지는 한참 먼 길인 것이다. 다행히 판촉 행사 중이던 젊은 아가씨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무수히 많은 것들 중 옳게 세제를 고를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아가씨가 판촉 중이던 제품을 가져왔다. 아마 조금 비싼 축이었겠지만 그렇게라도 감사를 표시할 수 있어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집의 세탁실은 윗층인 옥상이었다. 신발을 신고 나서야 하는 곳으로 빨래를 하러 가는 것은 아주 오랫만이라 낯설었다. 게다가 중간엔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 있어 빨래를 하러 갈 때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열쇠와 핸드폰을 챙겨가야 했다. 상당히 귀찮았지만 그래도 막상 옥상에 올라가면 기분이 괜찮았다. 주위의 건물이 높지 않아 시야가 나름대로 트여 있었고, 건물 키보다 조금 더 큰 야자수들의 머리채가 빼꼼히 나와있는 모양이 전형적인 남국의 풍광이라 퍽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김여사도 옥상 세탁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지구상의 모든 세균을 박멸해 낼 것만 같은 태양빛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길 위의 우리를 금방이라도 쓰러트릴 것 같았던 태양의 기세라는 것은 빨래 건조에는 그저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한시간이면 바삭하게 마르는 빨래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걷어오곤 했다. 걷어오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에도 순식간에 흘러나오는 땀방울은 빨랫감을 늘리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걷어온 빨래에선 햇빛 냄새가 났다. 물론 세제 냄새도 났다. 그런데 세제 냄새가 묘하게 햇빛 냄새와 닮아있어 두가지 냄새가 마치 한가지 냄새처럼 잘 어우러져 있었다. 따뜻한 냄새가 났다. 공기에 층이 있다면 그 층층마다 목화솜이 넉넉히 들어가 있는 듯 푹신한 냄새가 났다. 빨래에 얼굴을 묻고 조금 흠뻑 들이마셔 보았다. 김여사도 같은 모양을 했다. 둘 다 인공향료를 꺼리는 사람같지 않았다.

번거로운 빨래를 즐겁게 만들어 준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였던 이 세제는 세정력도 일품이었다. 조금만 넣어도 빨래를 깨끗하고 하얗게 만들어주어 그야말로 김여사의 애정템이었다. 이 세제는 양 대비 효율이 높은 덕에 잔여량이 많아 한국에 돌아올 때 챙겨 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몇 달 동안 잊고 있다가 최근 김여사가 꺼내 쓰기 시작했다. 김여사는 이 세제가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쓸 때마다 "참 깨끗하게 빨린단 말이야" 하며 흐뭇하게 세탁기를 돌렸다. 나 역시 따가운 햇볕이며, 톱니같은 모양의 넓은 잎을 가진 야자수의 머리꼭지며, 등줄기로 흐르던 땀방울이나, 살이 아주 가늘어 잘못 세우면 곧잘 후들거리던 간이 빨랫대라던가, 무엇보다도 그 훅_하던 공기, 고온건조하던 그곳의 공기냄새가 담겨 있고 닮아 있는 그 세제가 참 좋았다. 하여 세탁기를 돌리는 김여사 옆에서 말을 받아 넘기곤 했다. "응, 참 좋아."


저저번주부터 화장실이 눈에 밟혔다. '디데이는 바로 오늘이다!' 스스로에게 천명하고 수면바지를 돌돌 걷어부쳤다. 노동요를 재생시키고 두 손에 고무장갑을 단단히 장착하고 본격 화장실 청소에 돌입했다. '화장실의 모든 지점에 내 손바닥이 가 닿게 하겠노라' 는 슬로건 아래 갖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 화장실을 청소했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 아주 뜨거운 물로 화장실 전신을 가시고 바닥을 정리하다 대만에서 사온 이 세제를 발견했다. 들어보니 무척 가벼워 살짝 흔들어보니 찰싹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썼네." 괜히 아쉬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 같아 열어서 확인해보지도 않고 얼른 다른 빈 통들과 함께 빼두었다. 청소가 끝날 쯤 김여사가 귀가했다.
"아이고 화장실이 호텔같구만~"
"엄마, 이 세제 다 썼는데 버릴께"
"조금 안 남았나? 한번 헹궈서 싹 쓰지?"
"에이 다 썼어. 그냥 버릴께."
"그래 알았어."

김여사가 조금 아쉬운 기색을 비추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란 여자, 더이상 옛 추억에 사로잡히지 않는 냉혹한 여자지.' 하는 표정으로 세제통과 다른 빈 통들을 한아름 들고 재활용 분리함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소소한 뒷정리를 하는데 자꾸만 세제 냄새가 났다. 아니,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의 기억이 킁킁대고 있었다. 킁킁, 킁킁.

'거참 질척대네.'
내 안의 냉혹한 그녀가 질척이에게 한마디 내뱉곤 다시 세제통을 찾아 열어보았다. 빼꼼히 들여다보니 1회 분량이 채 안될만큼 남아있었다. '아휴 그래, 한번 더 써." 츤츤거리며 세제를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가져다 놓는 길에 사진도 한 장 찍어두었다. 아무래도 최후의 세탁 후엔 해외직구를 할 것만 같다. 그렇게 덥다고 투덜거렸던 공간과 시간이 이렇게 종종 불러내고픈 존재가 된 걸 보면 추억이 되는 조건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그 조건은 매번 같진 않겠지만, 이번 대만편에 대한 그 조건만큼은 아무래도 나의 모든 풍경 속에 있었던, 엄마. 같다.




2018. 1. 8.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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