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다행이다

by 릴리슈슈


몸이 피곤한 날이어서 초저녁에 살풋 잠이 들었다.
가벼운 비가 지나간 산 곁의 넓고 단정한 길을 걷고 있었다. 왼손으로 엄마의 손을 꽉 쥐고 우리는 천천히또박또박 걷고 있었다. 뒤로는 오빠가 따라 걷고 있었다. 우리는 간간히 고개를 돌려 오빠를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짤막한 말들을 주고 받았다. 아빠를 추억하는 말들이었다가 또 아니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보고 싶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집에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갑갑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아빠는 잠시 출장을 간 걸로 해두자고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늘에 합성처럼 아빠 웃는 얼굴이 동그랗게 떠올랐다. 이 얼굴을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났다. 기억을 되짚어 내 핸드폰에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았다. 없진 않았지만 많지도 않았다. 좀 더 찍어 둘 껄, 애꿎은 핸드폰인지 기억인지를 손으로 연신 쓸고 닦아 보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새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눈을 뜨니 불이 훤한 내 방이다. 아빠는? 집이 컴컴하고 조용한 것을 보아 아빠는 숙면 중이다.
조금 눅눅했지만 정갈했던 산길과 꽉 잡았던 엄마의 손의 감촉이 얼얼하게 남아있었다. 꿈을 천천히 복기해보았다. 꿈의 전반적인 모양이나 색깔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비통함이나 애달픔 없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우리들은 모습은 마치 하늘 높이 올라 어딘가로 막 길을 떠나는 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처럼 아쉽지만 좋은 작별이었다.

'다행이다.' 꿈을 복기하고 나서 나는 다행이다_ 라고 아주 여러번 생각했다.
굴곡진 시대에 태어난 아빠는 그 곡절들을 빠짐없이 겪어 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 향해야 할 지 모를 분노는 아빠 가슴에 크고 붉은 자국을 남겼다. 불덩이를 빼닮은 그 자국은 아빠가 일한 급여를 떼이고 돌아오는 날엔 소주와 만나 더욱 크고 무섭게 타오르곤 했다. 삶과 술과 엎치락 뒷치락 하는 나날들은 아버지의 노년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하지만 5년 전, 문득 아빠가 유년시절의 작은 꿈을 기억해낸 다음부터 아빠는 아주 조금씩 소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더 웃고 조금 덜 소리쳤다. 가끔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며칠 전에는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다. 가슴의 불덩이 같은 붉은 자국은 어느샌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다." 지난 일년 간 그런 아빠를 지켜보며 다행이다. 하고 생각해왔던 것이 떠올랐다.
아빠의 지난 행보와 나의 짤막한 꿈이 아빠의 숙제가 이제 다 끝났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이제 얼룩덜룩한 페이지는 지나가고 아빠는 당신이 쓰고 싶었던 당신의 진짜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것이다. 그런 아빠 덕에 나도 언젠간 내가 맡고 싶었던 공기가 있는 곳으로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 비슷한 것이 든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사진을 올해는 많이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8. 1. 10.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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