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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Sep 29. 2018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버튼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애인과 이별 통화를 하고 있었다.

늦은 밤의 통화였다.

전화기 너머의 애인은 피아노 연주곡을 반복 재생해놓고 있었다.


대화가 멈추면 그 빈칸을 피아노 연주곡이 채웠다.

애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거 틀어놓으니까 우리 무슨 드라마 속 사람들 같지 않아요? 

 우리가 조용하면 이게 꼭 드라마 배경음악처럼 들리니까."

"그러게요. 이 상황에 틀어 놓으니 웃기네요."



-

우리는 꽤 오래 통화했다.

"이렇게 오래 통화할 줄 몰랐는데.. 이거 몇 번째 나온 줄 알아요?"

"몇 번째예요?"

"스물다섯 번."

우리는 웃었다.



-

또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지난 일들을 헤집으며 진지하다가 화를 내다가 미안해했다.

"노래 몇 번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네."

"업데이트 해줄게요. 72번."

"72번? 하하하”



-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해의 기억들이 뒤늦게 이해로 돌아섰다.

우리는 미안해했고 찡해했고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진작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쵸."

"맞아요.."

"노래. 이제 몇 번째 나온 줄 알아요?

"글쎄, 한 90번쯤 됐나?"

"104번."

"헉."



-

마지막 통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전화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그가 끊자고 하면 내가 씁쓸해했고, 그러다 내가 끊자고 하면 또 그가 씁쓸해했다.


"지금 노래 몇 번째 나오는 줄 알아요?"

"125번."

"헐. 이러다 천 번 될 때까지 통화하겠네요. 크크."

"그럼 아침 돼서 자전거 타고 출근하면서까지 통화하겠네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페달을 밟으며 허공을 향해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내 얼굴과 입은 진지하다 성을 내다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느라 몹시 분주했다. 

핸들을 이리 저리로 꺾고 신호를 기다리며 심각한 이별 통화를 열두시간 째 이어가는 모습이라니.


몹시 웃겼다.



-

엄청나게 웃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웃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도 나를 따라 엄청 웃었다. 우리는 한참 킥킥댔다. 웃음소리가 겨우 조금 잦아들었을때 우리는 말했다. 

"지금 끊어요 우리. 이렇게 웃으면서 끊어요."

처음으로 의견이 맞았다. 전화를 끊었다. 노래가 147번째 반복될 때였다.



-

진작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너무 생각난다고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힘들까 봐 걱정된다고

내가 힘든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그때 말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솔직할 수 있었다면,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조금만 더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면. 우리는 언성을 높이는 대신 많이 킥킥댈 수 있었을 텐데. 좋았을 텐데.



-

'좋았을 텐데.' 저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다. 이대로 뒀다간 147번 반복되겠지?

..

그만 이 노래를 끝내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싶다. 그런데 오른쪽 화살표 버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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