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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Jan 20. 2019

퇴사 전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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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할 즈음 나의 로망은 남들 일할 시간에 카페에서 노닥거려보는 것이었다. 

퇴사 이후 마침내 그걸 해보았는데, 두어 번 하고 나니 혼자로서의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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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일 년이 훨씬 넘은 어느 날은 구름이 한참 내려앉아 무척 흐렸다. 

하굣길 지하철에 올라 캐서린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직장인인 캐서린 언니는 바쁠 테지만 가끔은 괜한 카톡을 넣어보고 싶은 것이다. 답장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퇴근은 아니고 퇴근 비슷한 모양새로 회사를 나서던 참이라 했다. 오! 서로의 경유지도 일치하여서 우리는 잠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늘 북적여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호수 뷰 자리를 떠올려 언니를 인도했고, 평일 낮시간인데도 꽉 찬 그 공간에서 운 좋게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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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그야말로 만추의 풍경이었다. 

올해 볼 수 있는 마지막 단풍일 것이어서 우리는 석촌호수를 자주 지긋이 응시했다. 나는 시험이, 언니는 마감이 남아있어 마음 놓고 낄낄거리지는 못했지만, 나의 로망 하나가 아름답게 실현된 것 같아 조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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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첫눈이 오고, 이제 나무들은 거진 헐벗어 간다. 

단풍과 어깨를 나란히 한 애플망고 사이다 사진을 보며 뿌듯함을 곱씹는 초겨울 자정이 따뜻하다. 






2017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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