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에겐 루틴이 필요해
백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루틴이다.
매일 해야 할 것들을 정해두고, 어떻게 되든 그것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때쯤엔 하루가 오래 삶긴 분질 감자처럼 푸스스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을 감당해야 한다.
자발적 백수였는데, 타의적 백수가 되었다. 지원해 둔 회사가 접수기간을 연장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일할 일터와도 조율이 필요해 시간이 애매하게 떠버렸다. 몇 주 전까진 꽤 즐거운 생활이었는데, 슬슬 별로 즐겁지 않아진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이 시간을 잘 보내는 수밖에.
욕심껏 모든 일을 해낼만한 캐릭터는 되지 못하므로, 나는 잠시의 생각 끝에 세 가지 영역을 설정했다. 그리고 세 가지 영역을 골고루 하는 하루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세 가지 영역은 '학습', '창조', '유지' 이다.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이긴 하지만.) 세 가지 영역에 따른 매일의 루틴은 다음과 같다.
다이어트를 위한 항목 몇 가지.
새로 일을 시작하기 전 '반짝' 그리고 '바짝'하려고 했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길게 가기로 했다. 엄격한 관리는 그만두고, 생체리듬에 따라 운동량과 식단을 조절하기로 했다. 유산소 운동은 꼭 챙기고자 '2주일에 10키로 빠지는 춤' 을 계속해서 따라 하고 있다. 유튜브가 보여주는 연관 동영상을 타고 미쿡오빠가 진행하는 cardio 채널 (The Fitness Marshall)까지 진출했다. 미쿡오빠의 잔망미 덕분에 힘들지만 흥겹게 하고 있다. 밥은 반공기, 간식은 없고, 배고플 땐 이유식 같은 야채과일죽을 먹는다..고 쓰고, 200칼로리의 카페라떼를 들이켠다.
영어회화 대화문 암기.
당장 쓸 일이 없어 10년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은 영어를 당장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책을 샀다. 같은 불안감을 가진 혈육과 함께 암기를 시작했다. 오늘치를 외우고 나면 어제, 엊그제 분을 복습한다. 어제의 문장들은 복습이란 이름이 무색하도록 낯설어 항상 소름 끼친다.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하지만 '삶에 왕도 없음' 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불평을 삼키고 회화를 암송한다. 책 제목엔 '100일의 기적'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대화문 100개 중 17개를 외웠다.
중국어 일본어 문장 암기.
'백수니까 뭐라도 더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꾸 일을 만든다. 조금 배워 둔 중국어나 일본어가 아깝기도 하다. 사실 공부하다 보면, 아까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만 그냥 해본다.
같은 문장을 다개국어로 번역해 둔 교재를 찾고 있었는데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네이버다. 네이버 로그인 창 아래에는 날짜와 함께 몇 가지 정보들이 제공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영어회화다. 그 문장을 클릭하면 '글로벌 회화' 라는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같은 문장을 15개 언어로 번역해놓은 페이지가 있다. 대단히 놀랍고 반가웠다. (중국어는 가끔 틀린 번역이 있긴 하지만..)
영, 중, 일어를 외우는데 역시 일어는 아까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아무래도 구몬 일어를 신청할 것 같다. 평생의 로망인 프랑스어는 발음조차 따라 할 수 없어 좌절했다. 허나 언젠간 배워볼 기회가 있겠지 하고 그냥 두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늘 해보고 싶었던 형태의 공부라 하는 데까지는 할 생각이다. 오늘이 무려 이틀째.
글쓰기.
글은 작년 하반기부터 꾸준히 쓰고 있다. 처음엔 습관을 들이려고 한 줄이라도 매일 쓰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한 달을 하다 보니, 뿌듯하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는 며칠 쓰지 않으면 영 찜찜해서 얼른 다시 쓰고 싶게 되었다. 습관이 잘 안착한 것 같아 감사하다. 매일 글을 쓸 수 있게 된 데는 내가 세운 원칙들이 큰 역할을 했다.
1. 쓸 것이 없어도 뭐라도 쓴다. 2. 아무리 구려도 쓴다. 3. 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쓴다. 4. 다 쓴 글은 웬만하면 '공개'로 해둔다.
저 중 가장 도움이 되었고 되고 있는 원칙은 '아무리 구려도 쓴다' 이다. 지금도 구림이 느껴지지만 계속 쓰지 않으면 난 계속 구린 채로 머물러 있을 테니까, 이 구림은 못 본 체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것이다.
그렇게 쓴 글이 130편 정도 되었다. 한 줄짜리도 있고, 구린 것도 있고, 개괄만 쓴 것도 있고, 극심한 용두사미형 글도 있다. 그래도 그만큼 써두니, 썩 나쁘지 않은 것이 그중 10편 정도 있다.
작업량이 많을수록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도 함께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칼럼을 봤다. 칼럼은 최근 크게 흥행한 '좋니?'와 '월간 윤종신' 의 사례를 들었다. (윤종신이 매달 '월간 윤종신'이라는 이름으로 곡을 발표한 지가 8년 째다. 곱하기 12를 해보면 76곡이다.) 삶에 왕도 없음을 다시 한번 크게 느꼈다. 종신 옹에게 리스펙을.
이것들 말고도 몇 가지 루틴이 있다.
매일 마스크팩을 한다거나, 근력운동 및 스트레칭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다. 대단할 것 없는 항목들이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하니 뭐라도 한다. 거대 눈사람도 고사리 같은 두 손이 꾹꾹 뭉친 눈덩이 한 알에서 시작하니까,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이도 저도 안되면 마스크맨쯤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