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보라색을 좋아하고, 언제나 아름다우셨던 나의 할머니를 추모하며.

by 소란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4년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 집에 할머니 혼자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60년간 사시던 그 집은 정말로 '빈 집'이 되었다. 어젯밤, 그 집이 벌써 청소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기가 있는 나는 할머니의 발인이 끝나자마자 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60년의 역사가 서려있는 그 집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못내 서운하고, 마음이 시렸다.


그 집은 작은 것 같은데 작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정원에 꽃과 풀이 가득했다. 분재와 화초 가꾸기가 취미이셨던 할아버지는 정원 관리에 진심이셨다. 어렸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성실함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여름 방학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그 집은 항상 초록으로 빛이 났다. 할아버지가 정원을 서성이시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지중지하는 꽃나무들을 보기 위해 정원으로 나가곤 하셨다.


정원을 지나 '입춘대길'이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이 나왔다. 현관에는 할머니 신발 여러 켤레와 할아버지 신발 두어 켤레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발이 아주 작으셨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내 발 뒷꿈치는 할머니 신발 바깥을 수월히 벗어났다. 할아버지는 단출한 신사이셨다. 할아버지가 신으시는 거라곤 고작 검정 슬리퍼와 흰색 운동화가 전부였다. 그 시절 어르신들에 비해 매우 훤칠한 편이셨던 할아버지는 (얼추 175센티셨던 걸로 기억한다) 발도 큼지막하셨다. 할아버지의 큰 발과 할머니의 작은 발. 현관은 다른 사람들의 신발로도 곧잘 북적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관과 바로 붙은 거실 겸 응접실 겸 대청마루 겸 식당(!) 가운데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자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여름이면 그 아래로 시원한 자리 하나가 깔렸다. 뒤집어보면 이따금 개미가 있었다. 주택에서 개미 몇 마리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자꾸만 무엇을 꺼내 주셨다. 냉동실에서는 더위사냥이, 김치냉장고에서는 시원한 과일이, 끝도 없이 나왔다. 배달 음식보다 집밥이 익숙하던 시대, 나는 엄마밥보다 할머니밥이 곱절은 더 맛나다는 걸 배웠다. 할머니밥에는 엄마밥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이 세상에서 우리 할머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칠맛이었다. 김치, 조기, 가자미 조림, 탕국, 산적...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다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이 풍요롭던 시절, 나는 그 풍성함이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가족들은 그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자상에 꼭 달라붙어 여름이면 여름 음식을, 겨울이면 겨울 음식을 부지런히도 먹어댔다. 할머니의 감칠맛을, 사랑을 마구 먹어댔다.


현관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할머니 방이, 오른편에는 할아버지 방이 있었다. 할머니 방은 할아버지 방의 두 배였다. TV가 있었고, 못해도 성인 5명은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마루가 있었다. 낮에는 그곳에서 사촌들과 놀이를 하고, 밤에는 이불을 깔고 방장을 펴고 잠을 잤다. 할머니의 경대는 언제나 깔끔했다. 할머니댁 곳곳이 깨끗했다. 값비싼 건 하나도 없었지만, 집안의 모든 물건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아 깨끗하게 반질거렸다. 할아버지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방에 비해 턱없이 작은 공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물건들로 소중히, 그리고 깔끔히 꾸며져 있었다. 책장에는 한국 문학과 함께 고 이어령 교수의 베스트셀러,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 꽂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국문학과 일본문화에 관심이 많으셨고, 그 시절 정말로 드물게도 국가에서 지원하는 유럽 연수까지 다녀오신 정통 '엘리트'셨다. 할아버지의 고상함과 할머니의 정갈함이 한데 어우러져, 할머니댁은 언제나 화사했다. 곧잘 볕이 들고,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득하고, 그런 중에도 나름의 질서를 잃지 않던 집.


대청과 붙은 부엌에는 낡은 갈색빛의 문이 하나 달려 있는데, 이 문이 딱 할머니의 키 만했다. 할머니는 150센티가 될락말락한 분이어서, 내가 중학교 3학년 정도 되었을 무렵에는 부엌을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커서야 알게 된 건 할머니의 부엌이 정말로 좁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체구의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고 나면 부엌은 벌써 그득해져버렸다. 그 좁디좁은 일자형 부엌에서, 낡고 빛바랜 가재도구들을 가지고 할머니가 그 많은 식구의 입에 들어갈 음식들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철마다 부쳐주시던 김장 김치와 수많은 반찬들이 탄생한, 할머니의 따뜻하고 습한 '동굴'. 어느 겨울날, 고무 다라이에서 갓 무친 배추김치 한 줄기를 찢어 생밤에 동그랗게 말아 내 작은 입에 한가득 넣어주시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그 김치가 어떤 맛이었는지, 나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잊어서도 안될 것이고. 그것은 내가 맛볼 수 있는 최고로 매콤한 사랑이었으니까. 할머니 목소리가 떠오른다. "맛있나? 맛있제?"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나를 반기던 목소리가, 짐을 싸들고 대문을 나설 때는 아쉬워하고 서운해하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살갑고 정이 많던 할머니는 항상 택시 정류장까지 우리 가족을 배웅하러 나오셨다. 걷기를 좋아하셔서 연세가 80이 되셨을 무렵에도 이십대 초반인 나보다 세 배는 더 빨리 걸으시던 (과장이 아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처럼 빨리 걷는 할머니와 그 옆에서 보조를 맞추느라 (!) 속력을 높이던 우리 가족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셨다. 대문을 나서고, 골목을 지나서, 마침내 우리들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다음에도 올게요. 다음에 봬요. 여름에 뵈어요. 겨울에 뵈어요. 입학식 후에 봬요. 횟수로 몇 번이나 만났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두 분의 집을. 아마도 내 나이만큼도 안될 것이다. 겨우 그렇게만 만났을 뿐인데, 그새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버려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두 분의 집은 이제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는 그 집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속상하다. 너무나 속상하다, 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감정도 있다는 걸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속상하다. 두 분이 계시던 지방으로 내려갈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고향처럼 여기던 그 지방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더라면 내가 좀 다르게 행동했으려나. 더 자주 방문하고, 더 자주 전화를 드렸으려나. 늙고 병들어 외로이 계셨던 두 분의 심정을 더 깊이 헤아렸으려나. 내 삶과 내 걱정, 근심, 기쁨, 행복에 심취해 내게 가장 큰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들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간다는 걸, 그분들의 시간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걸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다. 알고 있었지만 눈을 감았다. 귀찮았으니까. 관심이 없었으니까. 마음이 없었으니까. 내리사랑에 보답할 치사랑 같은 것, 내게는 너무나 부족했으니까.


그 집을 청소하던 중 할머니의 서랍에서 발견된 사진들 몇 장을 전달받았다. 한 사진 앞에서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우리 아들을 안고 계신 사진이었다. 암만 봐도 우리 아들이었다. "우와, 진짜 똑같다." 곁에 있던 남편도 함께 놀랐다. 내 어릴 적 모습이었다. 예순의 할아버지와 그 품에 안긴 5개월 무렵의 나. 증손주가 태어나기 몇 년 전 돌아가셨지만,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미 증손주를 안아보신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싶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엄마를 낳으시고, 엄마가 나를 낳으시고, 내가 우리 아들을 낳고, 우리 아들은 또... (너, 나중에 결혼 할거니?) 그렇게 세대가 이어지고 시간은 멈춤없이 흘러간다는 진실이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쯤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내게 소중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나마저 죽어 없어진다해도, 그건 사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시간을 이겨낼 수 없다. 어느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나왔던 말인데, 'time waits for no one', 그러니까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새벽 눈을 떠 생각했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리고 그 집이 내게 준 사랑을 언제까지고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더욱 열심히, 행복해져보겠다고. 입관식 때 할머니 귀에 가까이 대고 약속을 드렸다. 할머니가 말씀하신대로 할머니 증손주, 우리 아기, 정성을 다해 잘 기르겠다고. 넘치도록 큰 사랑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마도 다 알고 계실거라 믿는다. 나는 할머니의 영원한 '기쁨조'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의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