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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그늘 Feb 13. 2023

나의 고향 묵호 그리고 서울

멸치볶음이 나를 유혹할 때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점수 100점 받던 날.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등에 업고 엉덩이를 툭툭 치며

“그늘이가 국어 1등이구나. 아유 잘했네” 하셨다.

부임하신 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자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부끄럽기도 하고 엄마 등처럼 포근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엉덩이 툭툭 치니까 먼지가 풀풀 나더라”

몇몇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수군거렸지만 나는 나 자신이 대견해서 남몰래 웃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병원 집 딸 수연이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흰쌀밥에 분홍색 소시지 부침, 장조림 그리고 멸치볶음이다.

슬쩍 훔쳐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관심 없는 척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화사한 한복 치맛자락을 쥔 민아 엄마가 교무실 쪽으로 급히 가고 있었다.

민아 엄마는 묵호항 근처에서 다방을 하신다.

점심시간마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와서 선생님들에게 나눠드리고, 민아에게 도시락을 주고 가신다.

그 모습을 보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어느 날 아침부터 엄마가 안 보였다.

엄마는 서울로 가셨고 오빠도 엄마를 따라갔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징어 배 타는 아버지와 중학생이었던 언니, 그리고 일곱 살 남동생과 살았다.

보리밥에 김치 조금이 들어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흰쌀밥에 멸치볶음은 무슨 맛일까? 궁금했다.

가끔 아버지가 배에서 말린 임연수어를 가져오면 연탄불에 구워 먹곤 했었지만, 멸치볶음 반찬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수연이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평소 나에게 말도 안 걸던 아이가 웬일일까?

“우리 엄마가 너 데려오래”

새침한 표정으로 혹시라도 나와 부딪칠까 염려스러운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갔다.

“어서 와라! 네가 그늘이니?”

“네 안녕하세요” 철 대문을 열어주며 수연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담장 위로 쏟아질 듯 빨간 장미 넝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기역으로 된 기와집이었다. 마당엔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고 가운데에 징검다리처럼 길이 있었다.

쪽마루가 있었고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자 넓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가 보였다.      

“수연아 손 씻고 네 방에 가 있어. 간식 갖다 줄게”

수연이 왼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탁 닫았다.


“그늘아 넌 마루에 있어” 쪽마루에 걸터앉아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집에 살면 공주가 된 기분일 것 같았다. 장미가 활짝 핀 정원이 아름다웠다.

수연 어머니께서 설탕물을 한 컵 가져다주셨다.

“너 우리 집에서 학교 다니면 어떻겠니?”

나는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수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서 지내면 먹여주고 재워줄게. 수연이랑 같이 학교 다니면서 공부 좀 가르쳐 줄래? 우리 수연이가 국어시험만 보면 틀리는구나. 이번에 너 국어 100점 받았다며… 네가 좋다고 하면 너희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볼게”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먹었는데 수연이랑 같이 맛있는 밥도 먹고 공부만 하면 된다는 말에 솔깃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볼게요.”

“저녁 먹고 가라”


부잣집에서 살면서 학교 다닐 생각을 하니 들뜬 마음이 되었다.      

“그늘아 저녁 먹기 전에 방 좀 닦아라. 마루에 걸레 있다.”

쪽마루에 하얀 걸레가 네모나게 접혀서 작은 그릇에 담겨있었다.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받아 걸레를 빨고 방을 닦았다.

수연이 방도 닦았다. 수연이는 책상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걸레질을 하면서 내가 왜 방 청소를 해야 하지? 기분이 나빴지만 어른이 시키는 일에 항변할 수 없어 잠자코 걸레를 빨아서 방을 닦았다.

깨끗해서 닦을 것도 없어 보였지만 수연 어머니는 방 닦은 걸레를 보더니 먼지가 많다고 다시 닦으라고 했다. 방을 두세 번 더 닦은 후에야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


소고기 뭇국, 달콤하고 짭짤한 멸치볶음, 그리고 하얀 쌀밥은 씹지 않아도 그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식탁에서 밥먹는 것도 생소했던 나는 정신없이 밥을 먹느라 수연이가 인상 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담 너머로 앙칼진 수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싫다는 데 엄마는 왜 그늘이하고 같이 지내라고 하는 거야? 난 싫어”

“쟤네 엄마도 안 계시고 형편도 어려운데, 공부도 같이하고 잔심부름도 시키면 얼마나 좋아?”

“난 싫어 지저분해서 말도 하기 싫단 말이야.”


그때야 수연 어머니가 나를 식모살이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으로 아이를 보내 잔심부름도 하고 아기도 돌봐주고 밥 얻어먹는 일이 그 시절에 종종 있었다.

집안일시키고 수연이 공부 가르쳐주는 대가로 밥과 숙식을 제공하려고 했지만 수연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버지는 오징어 배를 타고 엄마도 안 계시니 가난한 집 아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니면 수연이가 국어 공부하는데, 내 도움이 필요해서 그랬나?

멸치볶음에 마음이 빼앗겨 남의 집 식모살이를 자처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화가 나서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났다.

엄마가 안 계셨지만 밥을 굶고 학교에 다닌 건 아닌데 수연 어머니는 왜 가난한 아이로 보았던 걸까?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평가한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그 후로 자꾸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고 마음대로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각처럼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멸치볶음을 보면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난다.

달콤하고 짭짤하지만 씹다 보면 씁쓸한 맛이 입안에 남아 맴돌던 멸치볶음.

마치 타인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겉보기엔 달콤해 보여도 그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이제는 멸치볶음이 달콤하게 유혹해도 꼭꼭 씹어 삼킨다.

남의 시선보다 나 자신이 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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