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폐쇄병동의 여름

사라진 수많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윤사강

티백을 찬물에 넣으면 아주 한참이 지나야만 비로소 우러난다. 아침 약을 먹고 잠이 든 사이에 둥굴레차가 모두 우러났다. 퇴원하는 H를 보낼 시간이었다. 우린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그동안 너와 함께 병동에서 지낼 수 있어 좋았노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H를 시작으로 한 명씩 병동을 떠나가면 우린 더 이상 이렇게 매일을 함께할 수 없겠지. H의 퇴원이란 언젠간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리란 것을 시사했다. 그때가 되면 J와 자매처럼 지내는 시간도 끝이 나겠지.


J와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언젠가 밖으로 나가게 될 날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서로의 희고 가는 손을 마주 잡고 침대에 함께 누워 있으면 마치 허공에 몸이 떠있는 것처럼 나른해서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낮 시간을 거의 누워서 보냈고 J는 그런 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책을 읽었다. 난독증이 있는 그녀는 책을 아주 천천히 한 페이지씩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J는 완벽하게 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그리고 우리가 퇴원하던 날, 두 초점은 지난한 과거 어딘가에 머무른 채로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진하게도 순간의 진심이 결코 바래지지 않고 우리의 숨보다 길어지리라 믿으면서. 그때는 그게 우주였고 전부였다.


끼니가 끝나면 J는 화장실로 뛰어가 온 얼굴에 물 범벅을 하고 왔다. 얇은 손가락을 목구멍 깊은 곳까지 넣고 한 입조차 되지 못하는 음식물을 뱉어내는 건 식사가 끝난 후에 J가 매번 반복하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처리는 신속했고 조용했다. J가 직접 얘기하지 전까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일련의 과정을 알지 못했다. 숙련된 그녀의 처치는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토하기를 반복할 바엔 차라리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게 어떤 고통인지를 깨달은 건 J가 영영 없어져버린 뒤였다.


나는 그녀와는 달리 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를 내었고 치열하게 변기를 붙잡았다. 뱉어내기 위해서는 삼킬 때의 몇 십배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울진 않았지만 어느새 울고 있었다. 이 모든 걸 홀로 무수히 반복하던 J가 생각났다. 그제야 알았다. J가 매일 게워냈던 건 그저 음식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음식물을 뱉어내며 남은 온기까지도 조금씩 뱉고 있었다는 것을. 더 이상 비워낼 게 없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그렇게 가볍게도 스스로를 버릴 수 있었던 걸까.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의 삶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뼛속 깊은 곳까지 따뜻해질 수 있었던 걸까.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겨울은 왔고 가끔 맨발로 걷던 나는 뒤꿈치가 다 닳았다. 바스러진 계절에도 인연은 질기게 이어져 몇 해 전에는 병동의 그 얼굴들과 안부도 물었다. 누군가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집을 마련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병동에 있었고 J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어쨌든 더 이상은 그때처럼 쪼그려 앉아 라디오로 음악을 듣진 않게 되었다. 여전히 잘들 지내고 있겠지.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나니 나도 제법 살만해져서 배가 잔뜩 부른 밤이면 가끔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한다. 이제는 옷 깃조차 스칠 일이 없겠지만은 참 소란했던 여름의 한 조각쯤을 우리가 나누어 가졌다니 살며시 마음이 놓인다. 그 해 병동의 여름은 영영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겠지. 순간은 이어져 실처럼 길어졌고, 길어지다 못해 끊어져 버린 실은 다신 엉킬 생각을 하질 않네. 정말 소중한 무언가가 깨질 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 공간만을 남긴 채 사라진 수많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