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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니 Aug 29. 2022

사랑이 구원은 아닐지라도

나는 언제나 나를 구해낼 수 있다.

사는  버거워 매일 하루에  편씩 영화를 봤던 적이 있다. 영화를 보면 적어도 하루에  시간 남짓은 흘려보낼  있었던 셈이다. 주로 골랐던 것들은 인간과 삶에 대한 영화들. 보다가 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들. 그래서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남은 하루는 영화 때문인지 나의 우울증 때문인지   없지만 가슴이 아픈 채로 보냈다. 그때 매일 같이 봤던 영화들은 느낌만 떠오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삶이 영화 같던  시절엔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은 적이 있다. 마음이 무너지는  어떤 건지 너무  알았기에  다른 누군가를 붙잡아주고 싶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마음 역시 내가 구원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실망을 동반했다. 실망은 줄곧 그런 것이었다. 옅게 알고 많이 기대하는 것에서 비롯된. 그런 기대는 쉽게 부풀었고 그런 실망은 생각보다 썼다. 앎의 편린들은 그래서 위험했다. 모두가  생각 같진 않았다.


새로운 만남은 낯익은 이별을 동반했고 어떤 헤어짐은 큰 타격조차 주지 못한 채 진부한 추억만 몇 개 남기고 사라졌다. 이별이 더 이상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 나는 사랑을, 그리고 기대를 그만하기로 다짐했다. 누군가에게서 구원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리라. 거대한 포부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찾아온다. 꾹 닫았다고 느꼈지만 옅게 가 있던 마음의 실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사는 게 버거워 영화로 두 시간을 간신히 버텨내던 시절, 사랑이 구원은 아닐지라도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임엔 틀림없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흔한 말. 사람에게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삶이 헤집어놓은 상처에게도 사람은 특효약이었다.


내가 방황하던 시절을 이유로 나를 떠난 이도 있었지만 반대로 내가 방황하던 시절 곁에 있어주겠다며 먼저 손을 내밀던 이도 있었다. 나의  순간순간에 언제나 사람이 함께했다. 삶이 죽음과도 같던 어느 시절, 나는 덕분에 일어설  있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할  벌어지는 가장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가미를 선사받은 물고기처럼 나는 비로소  밑에 잠겨서도 숨을   있었다.  다른 삶의 암흑기가 오면 다시 한번 버둥거릴지도 모르지만 함께  내밀어주는 이가 있으니 나는 언제나 나를 구해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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