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시작하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졸업앨범에 들어갈 장래희망을 '디자이너'라고 적었었다. 같은 반 친구들과 부모님들 앞에서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소개되던 순간, 어색하게 지었던 미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13살 아이의 꿈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던 첫 순간이었다.
가수가 꿈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해서 디자이너를 꿈이라고 적었던 어린아이는 자라서 공교롭게도 디자인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디자이너가 되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진 건 아니겠지만, 정말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용기를 내서 가수라고 당당히 적어볼걸 그랬다. 노트북을 붙들고 새벽까지 씨름하는 날이면 꼭 초등학교의 졸업식이 생각났다. 난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자라는 데 실패한 것만 같았다.
항상 모든 게 완벽해지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시작하려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엉망이었고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았지만 순서를 기다리느라 나의 리스트는 늘 줄이 길었다. 시작은 않고 걱정만 하던 것들은 금세 무게를 찌워 맘을 무겁게 했고 가끔은 스스로가 꿈에 잠식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금 이걸 해도 되는 걸까. 나도 이런 걸 해도 되는 걸까. 우습게 보이지는 않을까. 수많은 고민과 걱정을 안은 밤들은 자꾸 나를 지쳐가게만 했다. 깊은 생각과 철저한 계획에 자주 발목이 잡혔다. 문득 ‘가볍게, 가볍게’ 살아보라는 얼굴도 모르는 이의 말이 떠올랐다.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내게 된다는 말을 믿고 충동적인 결정들이 늘어갔다.
어떤 것들은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소멸했지만 어떤 것들은 두고두고 어떻게든 이어졌다. 시작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끝나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할 수 없던 ‘시작’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작곡이라던가 글을 쓰는 것. 크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작이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
이젠 순간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다. 새로 산 이불보가 뽀송해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고 내일 아침 일어나 먹을 마카롱이 하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더 나아졌다. 그냥 그런 거였다. 사소하고 별 것 아니지만 기분이 괜스레 조금 나아지는 것. 그런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루가 조금 더 괜찮아졌다.
가끔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종종 맛있는 밥과 디저트를 먹고. 언젠간 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것들을 그냥 조금씩 하면서 하는 삶. 문득 알게 되었다. 그 ‘언젠가’는 결코 ‘지금’이 될 순 없다는 걸. 언젠간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운동도, 음악도, 영어 공부도. 그냥 지금 조금씩 해버리면 되는 거였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