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겨울이 오면 사랑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 모두의 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집에 혼자 있던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죄인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인생의 젊은 날이 모두 지나가 버린 것도 같았다. 물론 내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음을 안다. 어떤 가수는 스물여덟 살을 ‘오렌지 섬’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켰다지. 내년이 되면 두고두고 들을 노래였다.
스물다섯 살이 예쁜 나이라던 또 다른 노래를 주제가처럼 듣던 시절. 복도 끝 차가운 바닥에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던 J 하나 덕분에 죽지 않았다. 하얗게 마른 그녀를 붙들고 지지부진한 날들을 견뎠다. 그녀는 가고 바스러져가는 글자만 남았지만 그녀가 간신히 더듬어가던 편지지의 온기를 아직도 느낀다.
사랑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번번이 구원받고 싶었다. 누가 주는 것이든 진심이라면 언제든 꿀꺽 삼켜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너와 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에서 나는 늘 스스로에게조차 버림받았다. 안다. 이해한다. 우리 모두는 텅 비어버린 것들을 유난히 잘도 구분해내는 사람들이었으니. 파티에서 만난 오빠는 술잔을 기울이며 복잡하게 사랑을 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말을 주문처럼 했다. 복잡하게 사랑을 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
슬픈 일이었다. 한때는 맞잡은 손이 영원할 거라고 믿은 적이 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영원할 거라고 거의 믿은 적이 있다. 거울에 얼굴을 띄울 때 늘 바라보던 얼굴이 가끔 낯설기도 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던 시선은 종종 엇갈렸고 이해와 공감은 서로를 이어주었지만 순간일 뿐이었다.
언젠가 29살의 기쁨 씨에게 들었던 말. 관계란 모래 같은 거라 잡으려고 하면 손 틈 사이로 다 흘러버리지만, 털어내려고 하면 또 잘 털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니 결국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살면 되는 거라고. 그는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인생을 기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고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삼았다. 그러다 우연히 오는 작은 행복에 크게 기뻐하는 것. 그게 그가 사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엔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바라보며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믿는다는 말이, 이해한다는 말이 때론 너무 가볍게 표류하는 것만 같아서 나의 순진함을 탓하기도 했다. 진심은 그저 순간에 영원토록 머무를 뿐 시간과 함께 늙어가진 않았다. 혼자 하염없이 추억하다 보면 진심이 닿던 순간은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른 것이 변해왔을 뿐.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언제든 서로를 떠날 수 있지만 또 언제까지고 서로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다. 모든 게 내 맘 같진 않은 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들의 뒷모습을 보며 살게 되겠지. 다만 뭐가 되었든 자연스럽게 보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