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아침 약봉지를 뜯을 때 한 번에 뜯어진다면 나는 이번에 합격할 거야. 잘 때 의자를 책상에 끝까지 다 밀어 넣지 않으면 좋은 꿈을 꾸지 못할지도 몰라. 베개는 항상 침대 중앙에 있어야 해. 내가 매일 강박처럼 생각하는 것들.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횡단보도를 건널 때 흰색만 밟고 건너야지 하고 다짐할 때도 있었다. 횡단보도의 마지막까지 무사히 흰색만 밟고 건넌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하는 바보 같은 망상과 함께.
어제는 완벽한 하루였다. 아침 약봉지는 깔끔하게 잘 뜯어졌고 사무실 엘리베이터는 내가 탈 수 있게 제 마침 1층에 도착해 있었다. 횡단보도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등이 바뀌었고 글은 술술 잘도 써졌다.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라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마치 합격하리라는 전조처럼 느껴졌다. 운수가 참 좋은 날이었다. <운수 좋은 날>은 결국 새드엔딩이라는 걸 잠시 간과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기다리던 발표의 경우, 합격자는 근무 시간 내에 메일을 주고 불합격자는 근무 시간 외에 메일을 준다는 얘기가 돌았다. 6시까지 초조하게 메일을 기다렸지만 어제는 유독 그 어떤 메일도 오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 그제야 <운수 좋은 날>의 결말이 떠올랐다. 혹시 오늘 또 떨어지는 건 아닐까.
기다리던 메일은 저녁 8시 반이 되자 도착했다. 열어보지 않았지만 불합격 메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탈락. 살면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시도한 것 중 가장 많이 떨어져 본 일이었다. 메일을 열어보자 아니나 다를까, 정중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똑같은 멘트로 불합격을 통보하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담당자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 콘텐츠는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분명 완벽한 하루였는데. 내 암시대로라면 분명 합격했어야 하는 건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나의 강박적인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아침 약을 뜯을 때 한 번에 뜯어진다면 합격하리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어제 하루의 결과가 내 오랜 강박을 이겨내 버린 것이다. 수년간 아침 약을 뜯어오면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약을 뜯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 약봉지 하나가 나의 합격을 좌우할 수는 없겠지. 알면서도 괜스레 기대를 걸어보던 나날들.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운수 좋은 날’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잘 해냈기 때문이리라. 이젠 나의 삶을 약봉지나 신호등 따위에 걸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