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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니 Aug 31. 2022

이젠 삶을 약봉지 따위에 걸지 않게 되었다

운수 좋은 날

아침 약봉지를 뜯을 때 한 번에 뜯어진다면 나는 이번에 합격할 거야. 잘 때 의자를 책상에 끝까지 다 밀어 넣지 않으면 좋은 꿈을 꾸지 못할지도 몰라. 베개는 항상 침대 중앙에 있어야 해. 내가 매일 강박처럼 생각하는 것들.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횡단보도를 건널 때 흰색만 밟고 건너야지 하고 다짐할 때도 있었다. 횡단보도의 마지막까지 무사히 흰색만 밟고 건넌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하는 바보 같은 망상과 함께.


어제는 완벽한 하루였다. 아침 약봉지는 깔끔하게 잘 뜯어졌고 사무실 엘리베이터는 내가 탈 수 있게 제 마침 1층에 도착해 있었다. 횡단보도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등이 바뀌었고 글은 술술 잘도 써졌다.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라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마치 합격하리라는 전조처럼 느껴졌다. 운수가 참 좋은 날이었다. <운수 좋은 날>은 결국 새드엔딩이라는 걸 잠시 간과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기다리던 발표의 경우, 합격자는 근무 시간 내에 메일을 주고 불합격자는 근무 시간 외에 메일을 준다는 얘기가 돌았다. 6시까지 초조하게 메일을 기다렸지만 어제는 유독 그 어떤 메일도 오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 그제야 <운수 좋은 날>의 결말이 떠올랐다. 혹시 오늘 또 떨어지는 건 아닐까.


기다리던 메일은 저녁 8 반이 되자 도착했다. 열어보지 않았지만 불합격 메일이라는    있었다. 다섯 번째 탈락. 살면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시도한   가장 많이 떨어져  일이었다. 메일을 열어보자 아니나 다를까, 정중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똑같은 멘트로 불합격을 통보하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담당자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콘텐츠는 진행이 어려울  같다는. 분명 완벽한 하루였는데.  암시대로라면 분명 합격했어야 하는 건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나의 강박적인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아침 약을 뜯을   번에 뜯어진다면 합격하리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어제 하루의 결과가  오랜 강박을 이겨내 버린 것이다. 수년간 아침 약을 뜯어오면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약을 뜯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 약봉지 하나가 나의 합격을 좌우할 수는 없겠지. 알면서도 괜스레 기대를 걸어보던 나날들. 모든   이루어지는 ‘운수 좋은 같은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해냈기 때문이리라. 이젠 나의 삶을 약봉지나 신호등 따위에 걸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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